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럴듯한 제이 Nov 08. 2020

조금 흔들려도 괜찮아

필름 카메라가 멸종하지 않는 이유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한정된 힘을 소비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지만, 보통 스스로가 우선시하는 것부터 순위를 매겨 먼저 실행하거나 에너지를 소분하여 적절히 사용할 것이다. 어쩌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나누어 꼭 필요한 활동만 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스스로의 무의식이 정한 우선순위에서 기인한다. 그 우선순위에서 멀수록 그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게 되는데, 보통은 당장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거나 주말로 미룬다. 특히 기력이 없고 무력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 가진 에너지나 의지는 한정적이니 최소한의 생을 유지하기 위한 일들만 쳐내듯 살아가다 보면 자신을 위해 사용할 힘이 바닥나기 때문이다. 자꾸만 소모되기만 하고, 충전할 시간을 가지기에는 기력이 없다.

그때의 나는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반복해서 움직이는 것이 천근만근 같아 언제나 축축 처지고 집에 가서 누울 시간만 기다렸다. 보통 사람들은 좋아할 주말과 휴일은 그때의 나에게 아침부터 밤까지 잠을 자고 가만히 누워 천정을 관찰하는 정적인 시간이었다. 그나마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미친 듯이 잠을 자거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극단적인 수면 패턴으로 다음 날이 고되었다. 사실, 살아내는 일 자체가 힘겨웠다. 이 한 몸 지탱시키기가 버겁고 힘에 부쳤다.


그랬던 내가 미놀타를 만난 이후로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일에 다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겐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사람을 만나고 거리를 걷고, 어딘가 일부러 찾아가는 정성을 들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체력이 그때는 많이 부족했다. 조금씩 미놀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내 안팎의 체력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한창 미놀타에 빠졌을  다른 필름 카메라를 찾다가, 자동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보고 싶어져서 한동안 사용했던 적이 있다. 미놀타뿐만 아니라 자동카메라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는데, 가장 좋았던 점은 가볍고 사용이 간편하다는 점이었다. 자동카메라 또한 옛날의 향수를 자극하는 절묘한 지점이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어느 지점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변하는 외모나 기능들을 보고 있자면 어떨 때는 놀랍다. 가끔 생산되지 않는 몇몇 카메라가 아쉬울 때도 있다.  한정된 숫자 또한 필름 카메라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당시 구입했던 두 번째 카메라는 캐논의 '뉴 오토 보이' 였는데, 사진을 찍으면 5가지 문구 중에 선택한 문구가 사진 아래에 뜨는 아주 귀여운 캡션 기능을 가진 카메라이다. 옆에 깨알같이 장착되어있는 조그만 리모컨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난다. 처음 카메라를 받았을 때 리모컨이 작동 안 돼서 저 멀리 옆 동네 시계방에 가서 시중가 세 배의 돈을 주고 건전지를 사와 손수 갈아 끼웠던 기억이 난다. 이 카메라는 내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졌는데, 그래서 그런가? 왠지 더 애틋하다. 빨간색 on 버튼을 누르면 지이잉-하고 올라오는 렌즈 소리가 너무 둔탁하고 곧 기절할 것 같은 소리여서 언제나 이 카메라를 켤 때면 혼자 웃음 짓게 된다. 여러모로 귀여운 구석이 많은 카메라이다.


미놀타나 오토보이나 사진을 찍다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초점이 맞지 않는 건 매한가지지만 오토 보이는 그나마 초점을 맞추지 않아도 자동으로 맞추어지는 점이 참 편리했다. 밤에 찍는 사진도 그런가 싶어 오토 보이를 들고 다니며 한창 사진을 찍어댈 때는 우리 집 2층을 올라가는 계단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찍기도 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보이는 화단의 작은 나무나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그림자, 벽 밖으로 뜬금없이 튀어나와 있는 수도꼭지나 지금은 막아놓은 용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배수관 따위의 것들. 수동이 아니라 자동카메라로 찍어도 거의 모든 사진은 흔들려있거나 어떤 피사체를 찍은 것인지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밤에는 낮보다 상대적으로 빛이 많이 모자라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사진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자동카메라니까 미놀타보다 결과물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초심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때는 필름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흔들린 사진들도 나름대로 꽤 괜찮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물론 밤에 찍지 않고 낮에 찍는다고 해서 사진이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가끔 흔들린 사진이 피사체의 또 다른 매력을 발산시켜 줄 때면 남모를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혼자 즐거워질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흔들리지 않고 반듯한 모양만 찍어내려 애를 쓰다가 나중에는 카메라가 담아내는 역광 속 인물, 일몰 속으로 바스러지는 옅은 빛과 일그러진 피사체의 흔들리는 순간들을 쫓게 되었다. 정답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카메라로 찍어낼 수 있는 피사체의 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된다. 사랑하고 예뻐할 수 있는 대상이 그만큼 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정말 무조건 처음에는 많이 찍어보고 실패해봐야 한다. 실패한 사진들 속에서 보석을 찾는 일이 잦아지면 선명하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은 사진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다. 되어보아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진부하지만 마치 삶과 닮아있다.


계획 없는 삶은 참으로 하릴없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느꼈던 그때는 몰랐다. 본래 우리네 인생이란 것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 상태가 가장 본질적인 상태인 것을 난 가끔 잊었고, 본질을 놓쳤던 나는 삶 속에서 자주 후회했다.

자의든 타이든 가장 본질적인 것에서 멀어져 살다 보니 허탈하고 조급해졌다. 완성될 수 없는 것들에 안달했고, 완성할 수 없음에 실망했다. 언젠가부터 계획적인 삶에 회의를 느꼈고, 하루 온종일을 꽉 채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에 상처받았고 그로 인해 무력해졌다. 어딘가 걸쳐진 데 없이 오롯이 스스로 꼿꼿이 허리를 펴고 살아 숨쉬기에는 난 많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전에 겪어 보지 못했던 생소한 경험은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고 비난하게 만들었다. 더더욱 삶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했고 결국 추락하게 했다.

그래서 처음에 필름 카메라가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필름 카메라로 촬영을 할 때는 그때의 내가 힘겨워하고 어려워했던 모든 점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당장에 결과를 알 수 없으니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었고, 집착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기다렸다가 잊힐 때쯤 카메라가 보여주는 장면들을 보며 되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모습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받아들이는 것, 그것만이 내가 미놀타와 함께하면서 먹으면 되는 마음이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들은 그저 넘기면 그만이었다.


숨을 푸우-뱉어 한숨 꾹 참고 피사체에 집중하며 초점을 이리저리 맞추어내는 번거로운 일. 그 모든 과정 위에 작은 손짓 한 번으로 빛으로 찍어내는 그 일련의 과정이 사진의 결과물보다도 더 소중할지 모른다. 그 정성이 쌓이는 시간이 어쩌면 나의 시선과 주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다루고 있다는 무의식 속에서 존재의 기쁨으로 반짝인다.

필름 한 롤을 완성한 후 잠시 잊고 있으면 그때의 기억이 재해석된 찰나의 장면들이 부친 편지처럼 팔랑거리며 도착한다. 어린 왕자의 여우가 말했던 것처럼, 도착하기 전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기다림의 미학을 즐길 수 있는 일. 필름 카메라가 멸종하지 않는 이유는 이 점 말고도 무수하게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풍경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앙마이에서 만난 그, 고양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