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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진 Feb 23. 2021

의사와 시민... 가혹한 것은 누구일까

 의료법 개정안과 전문직주의  

사건 1.

지난 2011년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 욕실에서 임산부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 수사 결과 범인은 남편, 백모 씨였습니다. 그렇지만 백 씨는 수사와 재판 과정 내내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대법원은 2013년 백 씨에 대해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했고 백 씨는 현재도 복역 중입니다. 아내의 목숨을 뺏어간 백 씨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사건 2.

이에 앞서 2007년 경남 통영에 사는 20대 여성 A 씨는 수면 마취제를 맞고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피해자는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가해자는 수면 내시경을 위해 찾았던 내과 병원의 의사였습니다.           

의사의 윤리 선언문인 히포크라테스 선서 사본(12세기)


의료법... 뭐가 문제냐면      

아픈 내 몸을 맡긴 의사가 살인자라면 어떨까요? 만약 성폭행범이라면 그의 손에 내 생명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이런 '가정'은 그러나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는 게 현재 우리나라 의료법입니다. 현행 의료법(제8조)에 따라 의사를 할 수 없는 경우는 아래 네 가지 조건뿐입니다.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도, 여성 환자를 성폭행해 그 존엄을 앗아가도 가해자 의사의 면허를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1. 정신질환자

2. 마약 같은 향정신성의약품 중독자

3. 피한정후견인

4. 의료 관련법을 위반했을 경우      


설혹 1번에서 4번의 이유로 면허가 한번 취소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나오는 게 의사 면허이기도 합니다.

의료법 제65조는 면허가 취소된 자라도 취소의 원인이 된 사유가 없어지거나 개전의 정이 뚜렷하다고 인정되면 면허를 재교부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길어도 3년만 기다리면 됩니다. 보건복지부가 낸 통계를 보면 2015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모두 124건의 면허 재교부 신청이 들어왔는데 이 중에서 120건이 재교부됐습니다.      



의료 소비자 입장에서는 좀 억울합니다. 의사들은 과거 범죄 전력을 공개하지도 않으면서, 범죄에 연루됐던 사람들을 자체적으로 걸러내지 않고 방치하며 의료 소비자의 선택권은 물론 안전하게 진료받을 권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 번 의사는‘거의’ 영원히 의사입니다. 수면 내시경을 하면서 여성 환자를 성폭행한 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그렇게 과한 건 아닌 듯한데 현행 의료법 상으로는 이런 의사들의 의사 면허를 박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건 2'의 가해자 의사는 지금도 경남 모처에서 병원을 운영 중인 걸로 전해집니다.



의료법이라는 철옹성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최근 통과된 의료법 개정안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좀 고쳐보자는 노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는 ‘의료 관련 법’을 위반해야지만 면허를 취소할 수 있었는데, 위반 법 조항에 상관없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면허를 취소할 수 있도록 면허 취소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금고 이상의 형'이란 건 실형을 선고받은 중범죄를 일컫습니다. 즉, 감옥에 한번 다녀와야만 하는 경우입니다. 또, 기존에는 한 번 면허가 취소돼도 3년을 기다리면 재교부가 됐는데 개정안은 기존 법에서 2년을 더해, 5년까지 재교부가 되지 못하게 기준을 높였습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경기 화성병)과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 중인 강선우 의원(서울 강서갑)은 면허를 영원히 취소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상임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5년 재교부 금지’로 완화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서울 은평갑)이 당초 제안했던 내용입니다. 같은 당 강병원 의원(서울 은평을, 사진)도 비슷한 내용을 발의해 이번 의료법 개정안이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국회 회의록을 뒤져보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뿐만 아니라 보건복지부도 의료법 개정안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문위원 역시 개정안의 필요성에 공감했습니다.

       

진료 행위 중 성범죄를 범한 경우조차 면허 취소가 아닌 자격정지 처분만 가능하도록 규정한 현행 입법 체계는 그 개선 필요성이 인정된다.
-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문위원 검토 보고서   
의료 면허 결격 사유 확대 부분에 있어서는 저희도 강화해야 한다는 방향에 공감하고 있고요. 의료 면허 재교부도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고.
- 2020년 11월 19일 보건복지 소위에서 보건복지부 제2차관 강도태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해 진짜 법이 된다면 사건 1과 사건 2의 의사 같은 경우가 또 발생했을 때 그 면허는 취소될 수 있습니다. 또 죗값을 치른 뒤 최소 5년은 지나야 의사 면허를 다시 교부받을 수 있습니다.



대한의사협회 가혹하다    

그런데 나 홀로 반대 중인 곳이 있습니다. 전국 10만 의사들의 이익단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의사협회입니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 회장(사진)은 지난 21일 이번 개정안이 가혹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코로나 19 진료 공백이 초래될 수 있다."라고 사실상 협박하면서 이번 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결사 저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의사의 면허를 취소하는 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의결된다면 코로나 19 진료와 백신 접종과 관련된 협력 체계가 모두 무너질 것이다. 이번 개정안은 가혹하다.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 - 최대집 회장(2월 21일)   


최 회장 말 대로 이번 개정안은 의사에게 가혹한 걸까요?   

최 회장의 말은 우선, 의사라는 전문직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소위 전문직은 배타적 전문 지식과 진입 체계를 갖고 있으면서 그 대가로 따라오는 사회적인 자원을 독점합니다. 그 직업군이 가진 전문성을 우리 사회가 꼭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런 독점을 허용하는 겁니다. 대신, 전문직은 사회의 기대치에 걸맞게 행동할 것과 높은 직업 윤리를 요구받습니다.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구성원에 대한 내부 규율시스템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전문직의 수준이 유지돼야 합니다.  


기자가 전문직인가? 에 대해서는 언론학계 내부에서도 이견이 ‘매우’ 많지만 변호사는 누가 봐도 전문직입니다. 변호사법은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끝나지 않은 상황을 변호사의 결격사유로 보고 면허 취소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변호사법 제5조). 변호사법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대표적인 전문직들에 대한 법, 즉, 법무사법, 변리사법도 이렇게 정하고 있습니다. 공인회계사법도, 세무사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성, 공공성의 관점입니다. 변호사와 법무사 일을 수행하는 데는 단지 준법 의식의 수준을 넘어선 도덕성이 꼭 필요합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법을 지켜내도록 하는 일을 맡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임성근 부장 판사에 대한 판사 탄핵안이 국회에서 소추된 이유는 임 부장 판사가 재판의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을 직접적으로 위반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덕성이라는 것이 비단 법 전문가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 공공을 위한 일을 하는 직업군이라면 특히 더 필요한 게 이 도덕성입니다. 국가공무원법은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되지 않았을 때는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도록 하고 있는데(국가공무원법 제33조) 이 역시 공공을 위한 일을 하는 직업군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공무원 개인의 잘못된 판단은 공공의 이익에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궁금해집니다. 의사는 전문직이 아닐까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일에서는 공공성을 찾을 수 없는 걸까요. 의사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이 국가공무원들에게 요구되는 수준보다 낮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국은 유죄받으면 영구 자격 박탈           

우리나라 국회의원이나 시민들의 도덕적 기준이 유달리 전 세계적으로 높아서 의사에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은 범죄 종류에 상관없이 벌금 이상의 형을 선고받거나 의료 관련 범죄 혹은 부정한 행위를 하면 의사 면허를 취소하고 있습니다. <의사법>, <치과의사법>, <보건사 조산사 간호사법>에서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독일 역시 형사 범죄에 연루된 의료인의 면허 취소에 대한 법이 있고 영국도 1983년에 제정된 의료법(medical Act)에 의해 형사 범죄로 유죄를 판결받았을 때 의사 등록을 영원히 삭제할 수 있도록 정해놨습니다. 프랑스도 중죄나 경죄를 선고받은 경우 의사 활동을 금지하는 보충형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구체적인 규정이 각 주(州)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역시 형사 범죄를 의사 면허 취소 사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메인주는 1년 이상 징역형이 나오거나 1년 미만이라도 성범죄의 경우는 면허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테네시주는 의료 광고를 과장되게 하거나 범행이 미수에 그치는 것만으로도 면허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다녀오기



가혹한 것은 누구인가?

의사가 전문직인 이유는 의사 직군으로의 진입의 배타성과 그 전문성을 우리 사회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파업을 이유로 국가시험을 못 봤다고 해서 총리가 나서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했던 것 역시 우리 사회가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전문직일 수 있는 존립 기반은 우리 사회이고 우리 사회는 의사들에 대해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코로나 19 같은 사회적 재난이 닥쳤을 때 공공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서 주는 것, 내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인권을 해치지 않는 태도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울러, 높은 기대 수준에 걸맞지 않은 나쁜 행동을 한 구성원을 자율적으로 걸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능이 대부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식구라고 감싸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의사 손에 내 생명을 맡기고 싶지 않다는 시민들이 가혹한 걸까요. 그런 요구를 가혹하다고 하는 의사들이 가혹한 걸까요. 의료법을 개정하겠다고 하니 다짜고짜 총파업 얘기부터 꺼내는 의사협회 회장을 봐야 하는 이 상황이 가혹한 건 일단 분명해보입니다.


나는 병자의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갈 것이며,
 어떠한 해악이나 부패스러운 행위를
멀리할 것이며...
-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


** <법안으로 세상읽기>는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통해 정치와 사회를, 그리고 우리를 들여다보는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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