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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금 Apr 23. 2021

용왕님의 번개(4)

 궁녀들이 안내해준 방은 서쪽 별채에 있었다. 방안은 바닷속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포근하고 따뜻했다. 신아는 보송보송한 이불을 덮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신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섰다. 용궁은 이제 완전한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헤엄치는 물고기도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듬성듬성 서있는 가로등만이 불을 밝히고 서 있었다.

 ‘아까 낮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연회장에 있던 그 많은 동물들은 어디로 간 걸까? 공주는?’

 용궁을 내려다보며 오늘 하루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보려던 신우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창문 앞으로 검은 형체가 지나간 것이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얼핏 공주의 얼굴을 본 신우는 자기도 모르게 별채의 문을 열고 공주를 따라나섰다. 공주는 낮에 본 비단 날개 옷 대신 신우와 비슷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공주를 부르려고 했지만 주위가 너무나 고요한 탓에 용기를 내지 못한 신우는 조심스럽게 공주 뒤를 따라가다가 그만 공주를 놓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공주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다. 당황한 신우가 별채로 돌아가기 위해 뒤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공주가 다시 나타났다.

 “놀랬다면 미안해. 따라와 보여줄 게 있어.”

 공주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신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신우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주위가 어두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말이야... 아까 낮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낮에는 깜짝 놀랐지? 요즘 자주 지진이 일어나고 있어. 너희가 살고 있는 땅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작은 지진이라도 바닷속에 사는 식구들은 충격이 클 수밖에 없지. 용왕님의 번개가 사라진 이후로 바다의 균형이 깨지고 있어. 바다의 질서가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상태야.”

 공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예전부터 아버지께 번개를 찾으러 떠나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하고 있어.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바다는 훨씬 넓고 위험한 곳이라고 반대하셨지. 그리고는 열두 살이 되기 전엔 용궁 밖으로도 나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어.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니? 바로 내 열두 번째 생일날이야! 오늘 낮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용궁을 둘러싼 벽에 더 큰 균열이 생겼어.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는 용궁이 파괴되고 말 거야. 더 늦기 전에 용궁 밖으로 나가서 반드시 용왕님의 번개를 되찾아 동해를 예전의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되돌려놓고 싶어.”

 신우는 자신과 나이가 같은 공주가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저... 내가 같이 가줄게!”

 “정말? 그럼 고맙지. 혼자 떠나는 여행은 재미없으니까!”

 공주가 반기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신우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리고는 용궁 입구의 마구간처럼 생긴 곳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돌고래 한 마리가 공주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예쁘지? 몇 년 전에 어미를 잃고 용궁 주변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신하들이 데리고 왔어. 그땐 정말 아기였는데 지금은 많이 컸지. 나중에 용궁을 나가게 되면 함께 가려고 그동안 훈련을 시켜 두었어. 우리 둘쯤은 문제없이 태울 수 있을 거야.”

 공주가 돌고래를 묶고 있던 고리를 풀자 돌고래가 유연한 몸짓으로 마구간을 빠져나와 공주와 신우 앞에 멈춰 섰다. 돌고래의 등에는 안장과 비슷한 장비가 묶여 있었다.

 “자! 내 손을 잡고 올라와.”

 먼저 돌고래의 등에 올라탄 공주가 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우는 돌고래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신우가 용기를 내 공주의 손을 잡고는 안장으로 올라탔다. 그러자 돌고래가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곧장 용궁의 입구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모두 쉿!”

 공주가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돌고래가 주둥이로 문을 살며시 밀자 등을 동그랗게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새우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땅에서는 저런 걸 새우잠이라고 하니? 오늘은 한번 봐주지.”

 공주가 신우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돌고래의 등을 한번 쓰다듬었다. 돌고래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신우는 용궁 밖을 나와도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바닷속 풍경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던 신우가 공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다녀올 생각이니?”

 “글쎄, 일단 멀리까지 가볼 생각이야. 벌써 걱정되니?”

 “아니야. 나도 번개를 찾을 때까지 널 도와줄게.”

 신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신우였지만 공주와 함께 떠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신우와 공주는 돌고래를 타고 동해 곳곳을 누비며 번개를 찾아다녔다. 많은 날들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동안 신우와 공주는 길을 헤매고 해파리 떼에 쏘이기도 하며 온갖 고생을 했다. 깊은 바닷속은 낮이면 희미하게 밝아졌지만 밤이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암흑이 되어 번개를 찾는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우와 공주 그리고 돌고래는 매일 어두워지기 전에 가까운 바닷속 동굴을 찾아 피로를 풀고 잠을 청했다. 쉴만한 동굴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굴에 이미 주인이 있으면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비어있는 동굴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잠을 자고 있던 집채만 한 문어에게 잡아 먹힐 뻔하기도 했다. 신우와 공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른 동굴을 찾아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밝자마자 일어난 신우는 동굴 입구에서 잠을 자던 공주의 돌고래가 없어진 것을 알아챘다. 신우는 얼른 공주를 깨웠다.  

 “빨리 일어나 봐! 돌고래가 없어졌어!”

 “뭐라고?!”

 깜짝 놀란 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굴 입구로 달려왔다. 동굴 입구에는 편히 쉬라고 풀어주었던 안장만이 남아 있었다. 돌고래가 있던 자리를 확인한 공주가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 말했다.

 “엄마한테 갔나 봐. 이 근처에서 돌고래 떼들이 자주 돌아다니거든. 아직 어려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가버리게 될까 봐 걱정했었는데... 결국 가버렸어”

 공주의 목소리는 담담한 듯 들렸지만 실망감이 묻어났다.

 “신우야. 이제 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바닷속에는 용왕님의 번개가 없을지도 몰라. 그런데 돌고래가 없는데 용궁까지는 어떻게 가지?”

 신우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돌고래 없이 돌아가기엔 용궁에서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것이었다.

 “일단 왔던 길로 천천히 돌아가면서 다시 한번 찾아보자. 아직 축제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용궁으로 가는 큰 물고기들이 있으면 태워달라고 부탁해보자!”

 “지진이 났다는 소문이 벌써 동해 전체에 퍼졌을 거야. 아무도 용궁에 가지 않을 거라고...”

신우는 낙심하며 주저앉는 공주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내가 수영을 해서라도 용궁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걱정 말고 어서 일어나. 번개를 찾아야지!”

 신우의 말에 공주도 힘을 내 일어났고 둘은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눈앞에 거대한 산호초 군락이 나타났다. 신우와 공주는 망설임 없이 산호 사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산호 사이를 헤엄치던 화려한 색깔의 물고기들이 신우와 공주를 구경하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몸집이 뚱뚱하고 지느러미가 축 처진 파란색 물고기 한 마리가 말을 걸어왔다.

“너희들 뭘 찾고 있는 거니?”

“혹시 이곳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본 적 있니? 꼭 번개모양처럼 생겼는데.”

공주가 기대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글쎄, 그런 게 있었다면 벌써 내가 먹어버렸겠지.”

 뚱뚱한 물고기가 이렇게 말하자 주변에 있던 물고기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산호초 틈새를 뒤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산호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신우는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 많던 물고기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 뚱뚱한 파란색 물고기가 뒤뚱뒤뚱 헤엄쳐가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이상하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신우가 다시 산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던 순간 신우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번개를 찾고 있는 공주의 등 뒤로 거대한 몸집의 검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자 수면 위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형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눈알을 천천히 굴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왠지 낯이 익었다. 신우의 머리에 용궁에 처음 온 날 용궁 안의 수많은 방 중 한 곳에서 보았던 장면이 스치듯 떠올랐다.

 “어서 피해! 청새치야!”

 신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공주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청새치가 공주에게 바짝 다가선 뒤였다. 청새치는 길게 뻗어 나온 날카로운 주둥이로 공주를 공격했다.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다행히 공주가 날렵하게 옆으로 피한 덕에 정면으로 부딪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주는 정신을 잃었고 몸이 축 늘어진 채로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신우가 깜짝 놀라 공주에게로 헤엄쳐갔다. 공주의 팔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옆으로 피하는 순간에 주둥이가 공주의 팔을 스친 것이었다. 청새치가 다시 다가오는 것을 본 신우는 공주를 안고 산호초 사이로 숨었다. 산호초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어 공주를 눕힐 수 있었다. 신우는 청새치가 산호초를 헤집고 들어올까 봐 두려워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풀거리는 산호초들 사이로 물고기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우는 정신을 차리고 근처에서 길게 자란 해초를 끊어와 공주의 팔에 묶어주었다. 하지만 공주는 의식이 없이 그대로 누워만 있었다. 빨리 용궁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우는 공주를 안고 산호초를 헤치고 빠져나왔다. 용궁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한 신우는 얼마 못 가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공주를 안은 손은 자꾸만 미끄러졌고 헤엄치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아래를 내려다본 신우는 바닥이 갈라져 끝도 없는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는 겁이 났다. 이대로 힘이 빠지면 깊은 바닷속으로 끝없이 가라앉을 것만 같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신우의 정신이 희미해지려고 하는 순간 딱딱한 무엇인가가 신우의 엉덩이에 다가와 부딪혔다. 그 바람에 공주를 안은 신우가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신우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몸을 세우자 거대한 붉은색 머리 하나가 보였다. 거북이였다. 신우는 엄청나게 큰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 자신과 공주가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북이가 곧장 용궁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본 신우는 한 손으로는 공주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거북이의 등껍질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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