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 나의 주 양육자가 되다
결혼하고 터 잡은 서울 신림동의 17평짜리 반지하에서 우리는 많이 아팠다. 작게 시작해서 크게 되자라며 꿋꿋이 버텼던 그곳의 생활은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장마면 물이 세고 곰팡이에 바퀴벌레까지 환경적으로 받은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우리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피할 수 없는 다툼과 우여곡절들이 많았다. 잠시만 가난하고 잠시만 궁상떨자 했던 게 우리에게 독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음도 아팠다. 우리는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리셋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사한 곳이 경기도 광주였고 이곳에서 더 좋은 환경 속에서 학연 지연 혈연으로부터도 독립할 수 있었다. 둘만 바라보는 삶, 번쩍번쩍한 도시와 집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마법처럼 안정적이었고 행복했다. 결혼 초반에 많이 싸워둔 덕인지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맞춰가고 있었다. 이 계기로 나는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행복한 리셋의 시간을 가져보았기 때문에 앞으로 떠날 이란과 터키에서도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더 행복하자'라는 주문과 함께 우리는 신랑이 가장 좋아했던 광주의 어느 뼈해장국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이곳과 작별을 했다.
우리는 떠나기 전까지 잠시 친정집에 머물렀다. 딱 일주일이었는데 갈 준비로 바빠서 같이 지내면서도 밥 한 끼를 제대로 함께한 게 도착한 날과 떠나는 날 딱 두 번이었다. 너무 바빴다. 정리하고 준비해야 할 행정업무들, 비자발급, 영문 면허 발급, PCR테스트, 장보기, 택배 보내기, 짐 싸기, 환전하기, 시댁과 친구들과 인사하기 등등 집에 붙어있기가 쉽지 않았다. 서울과 경기도를 수도 없이 오가며 밤늦게 귀가해도 불을 밝히고 기다려준 친정 부모님한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떠나기 전까지 좀 더 딸과 사위를 눈에 담으려 졸음을 이겨내며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막상 우리는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있었고 골아떨어지기 바빴다. 좀 더 부지런히 미리 준비했으면 여유 있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에게 두 번의 해외살이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다음이 있다면 그땐 온전히 가족을 위한 시간을 꼭 하루쯤 따로 마련할 것이다.
걱정과 설렘을 느낄 틈이 없이 바쁘게 일주일이 지나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벌써 공항에 와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함께 마중 나와준 친정 부모님과 눈물 머금은 포옹을 마쳤을 때 그제야 '아 이제 가는구나' 싶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내가 영국으로 혼자 유학을 떠날 때랑은 달리 '그래도 사위가 있어서 든든하고 다행이다.' 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모르겠다. 엄마는 그냥 엄마다.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고는 나는 빨리 출국 장소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더 있으면 나도 울 것만 같았다. 한번 눈물이 터지면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저 멀리서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신랑에게 첫마디를 내뱉었다. "나 이제 너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