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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h Aug 10. 2020

내가 모르는 그의 시간 (1)

은행 달력, 다이소 삼천 원짜리 둥근 플라스틱 벽걸이 시계


얼마 후에 아버지를 기억할 때 떠오를 것 같은 물건들이다. 얼마 후.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을 것 같은 시간 후에. 그래도 내가 '충분히' 어른이 되고 나서 이길 바라는 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아버지가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없다면, 저 두 가지 물건은 분명히 나를 울릴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가족들의 만류에도 내가 해드렸던 핸드폰을 던져 기여이 고장을 냈다. 뇌졸증을 몇 번씩이나 겪으면서 아버지는 거의 아이가 되었지만 슬금슬금 그를 채우기로 맘먹은 듯한 치매기도 그의 소싯적 성격을 달래지 못한 듯한 눈치였다. 병원에서는 건강한 청년었던 아버지를 반신불수로 만들었던 그 사고 때문에 감정을 처리하는 부분에 장애가 왔을 것이고 그 이후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내가 세상에 나고 지금껏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다 인데, 머리를 다치기 전에 그의 성격이 어떠했던 나는 알길이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2남 1녀의 막내로 자랐다. 1945년 일본 시코쿠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한국으로 배를 타고 왔다고 했다. 당시 해방 이후 정신없는 시국에 말뚝만 꽂으면 내땅이다고 우길 수 있었다지만, 그의 부모들은 그저 삿바느질에 남의 집일 해주는 것이 밥먹고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나마 그의 어머니도 내 아버지의 동생을 놓고 몇달 안되 돌아가시고 그 동생도 젖동냥을 다니다가 몇개월 살다 죽어버렸고, 그의 아버지도 이 후 몇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 손에 근근히 자라다 이집 저집 남의 집 머슴 일을 해주며 구박받고 얻어먹는 밥에 서러운 유년을 보냈다고 했다. 그가 직접적으로 유년이 '서러웠다'고 고백한 적은 없지만, 자라온 시절을 예기하는 그의 얼굴에 무슨 증거가 더 필요 했을까.


젖동냥 다니다 죽어버린 동생의 이름은 '기동'이라고


전화를 자주해서 귀찮게 할 것이니 해주지 말라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핸드폰을 개통해서 그의 손에 쥐어주긴했지만, 아버지의 핸드폰에는 형님과 누나의 전화번호를 입력시켜 주지 않았다. 암으로 돌아가셨지만 상대적으로 정신은 맑으셨던 큰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하고는 했을터이다. 큰아버지의 전화를 종종 기다렸을 아버지는 4년도 넘은 큰아버지의 임종을 얼마 전에야 알게되었다.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가 충격을 받을까봐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단합한 가족들이었고, 나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버지는 너무도 약해보였고, 그런 사람은 슬픔을 어떻게 견디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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