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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현 Jan 18. 2021

『인연』, 상흔의 기록

 순수하리만큼 악하지만 미약한 감정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아무리 삼키려 애써도 어떤 식으로든 존재를 드러낸다. 목 끝에 걸린 그 잔여물은 갈 곳을 잃고 날선 가시가 되기도 한다. 남겨진 감정의 온 궤적을 할퀴고 후벼판다. 쇠하지 않는 감정의 여진은 결국 상처를 내야 끝이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지울 수 없는 상흔만 몸에 남겨진다.



『인연』은 피천득이 아사코를 기억하며 적은 것이다. 30년의 긴 세월 동안 이뤄진 단 3번의 만남을 기록한 글이다. 짧지만 강렬하다. 피천득은 잊을 수 없는 그 순간들을, 그리고 아사코를 맑고 투명하게 응시한다.

'하얀 운동화, 화병에 담긴 스위트피, 연두색의 고운 우산'

그녀에 대한 의미화를 동반한 단어들은 담백한 문체 사이를 유영하며 싱그러움을 터뜨린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와 달리 마지막 만남에 대한 기록만큼은 짙은 음영이 드리워있다. 그는 허망해 한다. 위 인용문에는 그 안타까움이 잘 나타나 있다. 애끓는 표현의 첫 문장, 그리고 뒤따라오는 애절한 바람의 문장. 이 글을 읽고 독자가 깊은 여운을 느끼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사코를,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켜내지 못한다. 오히려 비정하게 조각낸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은 결국 아사코를 깨트림으로써 완성된다.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그녀의 얼굴. 허영심에 가득 찬 그녀의 남편. 절을 몇 번씩이나 했지만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기록들. 그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이유가 그들을 가로막은 시대, 환경, 혹은 자신의 미숙함이 아니라 초라해진 그녀의 모습이라니... 마지막 기억은 이룰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곡진한 기록이라기보다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비겁함을 지워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그는 무엇을 지켜내려 한 걸까?


『인연』은 순수하리만큼 약하지만 악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 악함은 그만큼 미약함을 드러낸다. 그의 비겁함을 쉬이 나무랄 수 없는 이유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앙금을 온전히 쏟아내지 못한 걸까? 그는 글 말미에 춘천에 다녀오겠다고 다짐한다. 아사코가 다닌 성심 여학원 소학교와 이름이 같은 성심 여자 대학이 춘천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소양강 경치를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록되지 않은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부디 미숙했던 자신을 용인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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