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오스카 시상식에선 단연 봉준호 감독이 빛을 발했다. <기생충> 만큼이나 그의 수상 소감은 매순간 번뜩였다. 그의 말에는 재치와 자신감, 그리고 겸손함이 묻어났다. 덕분에 전 세계 영화인 모두가 영화 언어로 통용된 세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할리우드만의 감독이라기보다는 세계 영화인들의 감독으로 소개됐다.
봉준호와 마틴 스콜세지. 분명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이지만 시상식 전까지 두 감독을 엮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봉준호가 시상식에서 언급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스콜세지의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 힌트를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 이하 더 울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틴 스콜세지가 미국 사회의 문제를 그려내는 방식은 <기생충>과 상당히 유사하다. 두 감독이 제기한 사회 문제는 각자의 나라에서, 즉 개인적인 문제의식으로 출발했지만 영화를 통해 보편적이고 날카로운 예술로 확장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화를 훌륭하다 여기는 근거는 무엇일까?
관객을 몰입시키는 방법 : 동일시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허구의 이야기이다. 관객은 영화를 거짓으로 바라보면서도 지각하는 대로 믿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화가 이중적인 그들을 불러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동일시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동일시는 관객이 등장인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며, 영화에 관객이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동반한다. 관객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동경하며 그들의 처지에 서고 싶어한다.
봉준호와 스콜세지는 바로 이 동일시에 대한 연출이 뛰어난 감독들이다. 그들은 관객들이 영화에 항상 몰입만 하도록 하지 않는다. 동일시를 일시적으로 거둬들여 영화와 관객의 거리를 만들고 현실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동일시는 그들에게 있어 영화와 현실 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장치이다.
<기생충> : 장르적 에너지로서 동일시
<기생충>이 나오기 전 한국영화계 기득권에 대한 사회비판 영화에는 대표적으로 <내부자들>(2015), <베테랑>(2015)이 있다. 관객은 부도덕한 지배계층이 전락하고 평범한 소시민들이 승리하는 이야기에 쉽게 몰입했다. 영화를 보며 느꼈던 통쾌함은 사회비판 영화의 주요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위와 같은 영화들이 과연 사회비판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가이다. 영화에서 임의적으로 해결된 문제는 새로운 질문을 던질 힘을 상실한다. 즉 영화는 프레임을 넘어 현실에 도달할 수 없다.
기생충 스틸(사진 제공 : CJ엔터테인먼트)
그렇다면 <기생충>은 어떠한가? <기생충>도 위 영화와 같은 외피를 두른 것처럼 보인다. 소시민인 기택(송강호)네 가족이 기득권자인 박 사장(이선균)네 집에 침입한다는 줄거리는 전복이 지닌 쾌감을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관객은 기택네 인물들에 동일시하며 언제라도 박 사장네를 차지할 기대를 품고 영화를 관람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기택네가 박사장네 집을 차지했다고 착각한 순간에야비로소 영화는 시작된다. 봉준호 감독이 간곡히 부탁했던 스포일러 금지는 이를 방증한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낙하의 감각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가 방점을 찍은 곳은 상승하는 ‘듯한’ 전반부가 아닌 추락‘하는’ 후반부이다. 그들의 상승이 그럴듯한 허상에 불과하다면 추락은 기정된 사실이다.
관객은 급작스런 추락에 인물들에게 향했던 동일시를 거두지 못한다. 영화의 막이 내리고 느껴지는 불쾌는 감독이 의도한 산물이다. 불쾌는 영화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이어진다. 영화 내 숨이 턱 막힐 듯한 축축함과 퀘퀘한 냄새는 분명 지각할 수 없는 물질임에도 스크린 밖으로 스멀스멀 올라온다. 관객은 더 이상 영화를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 관객 응시가 지닌 동일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스틸(사진제공 : 우리네트웍스)
<더 울프>는 월가에서 주가 조작 등의 사기로 억만장자가 된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다. 조던은 평범한 회사원에서 월가의 거물이 됐지만 마약과 섹스에 중독돼 한 순간에 전락하고 만다. 이는 한 가족의 흥망성쇠에 관한 이야기라는 <기생충>의 구성과 상응한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들의 변화를 흥미롭게 연출함으로써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더 울프>는 관객을 응시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동일시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직접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 관객이 지닌 관음증적 즐거움을 해치는 동시에 관객의 몰입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울프>는 지속해서 조던 벨포트가 관객을 쳐다보도록 연출한다. 이러한 관객 응시가 갖는 효과는 무엇일까?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스틸
<더 울프>에서 관객 응시는 오히려 동일시 효과를 높인다. 조던이 관객을 응시하며 마약 등의 불법 행위를 떠벌리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 이해도를 높이고, 그의 비밀을 엿듣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조던은 관객 응시를 통해 자신이 돈을 어떤 식으로 버는지 알기 쉽게 설명을 해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본인이 행한 불법 행위를 드러내지만 누가 그런 거를 신경 쓰냐며 정당화하고, 돈이면 다 된다는 자본주의의 환상에 관객이 서서히 젖어들게 한다. 관객은 자본이라는 기준 아래 조던과 동일시하려는 충동적 욕망에 휩싸인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관객 응시는 FBI의 제재와 함께 끝을 맞이한다. 그가 관객에게 말을 건네던 마지막 순간이 '광고(촬영장)'라는 점은 흥미롭다. 지금까지 조던이 관객을 응시하며 말을 건넨 행위가 그 자신을 좋게 포장하고 과장하는 광고 행위와 비슷해 보인다. 이미 그의 실체를 알아챈 관객 또한 그에게더 이상 쉽게 현혹되지 않는 때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관객의 의심과 비판을 증폭시킨다. 이제 그는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스틸
영화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교훈을 주는 전형적인 이야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스콜세지는 영리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한번 조던에게 기회를 주며, 관객을 시험대에 서게 한다. 영화 종반부 징역살이를 마친 조던은 청중들이 있는 '세일즈 세미나'에 강연자로 참여한다. 그가 청중에게 다가가 강연하는 모습은 의미심장하게 제시된다. 그의 초라한 행태를 드러내듯 영화는 화면 비율을 비교적 좁게 설정한다. 하지만 그가 청중에게 다가가 질문을 건네자 화면 비율은 확장된다. 다시 한 번 그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어 그를 동경하듯이 쳐다보는 청중을 보여준다. 그들의 모습엔 조던에게 세일즈를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서려있다. 최악의 범죄자도 자본주의 아래에선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사람으로 소개된다. 영화는 관객에게 다시 한 번, 조던에 대해혹은 열정적인 청중에 대해그리고 관객 자신에 대해 평가를 내리게 한다. 이러한 연출은 현실이 권선징악의 단순한 구조로 구성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조던에 동일시하려 했던 어리석음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게끔 한다.
그들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그들은 현실을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 문제로 닫힌 현실을 영화를 통해 열어젖힌다. 우리는 그들의 영화를 통해 현실을 고정된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전과 다른, 즉 변화하는 세계로 지각한다. 그들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고발하며 영화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묻게 한다. 영화란 무엇인가? 답이 있는 것도, 답을 꼭 내려야 하는 질문도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 그 자체에 있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현실 또한 변하지 않고 고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대한 그들의 질문은 현실로 확장된다. 끝없는 차이와 질문을 만들어내는 힘. 우리가 그들의 영화를 보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