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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쓰민 Mar 12. 2024

글감을 찾아 헤매이다

이젠 기억나지 않은 이유들


어젠 쓸거리를 찾아 뒤적이다 글감을 메모해 둔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몇 가지는 시간이 무색하게 간단한 메모만 보고도 그때가 떠올랐지만, 다른 것은 어떤 생각으로 왜 적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내 기억을 과신해 이 사달이 났다. 요즘처럼 쓸거리가 궁한 때에 얼마나 아쉽던지. 글감 노트를 서성거리다 이번엔 핸드폰 찾아 노트 앱을 열어보았다. 나는 지금 쓸 것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어딘가 주워 담을만한 글감이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가끔 메모할 곳이 마땅치 않을 때 사용했던 앱을 열었다. 근래엔 설교 내용, 책 서평, 정리 안 된 몇 개의 글이 있었지만, 손길 닿는 이거다! 할 것이 없어 스크롤을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본다. 그러다 스크롤이 급정거하는 순간. 비장한 제목의 글이 보인다.


‘잊지 말자. 000이 어떤 인간인지’ 제목까지 이토록 비장하게 적어둔 글은 다 펼쳐 읽어보진 않았지만 빼곡하고 짙은 검은색으로 저장된 것으로 보아 펜에 힘이 잔뜩 들어가 갈기 듯한 필체가 그때의 어두운 감정을 고스란히 전했다. 날짜는 23년 8월 11일. 싸움의 이유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느낌은 내가 미친년이지. 이런 걸 믿고 등등. 사람 같지도 않은 등등의 심정으로 적어두지 않았을까 싶다. 매번 잊고 아껴주려는 노력이 헛된 짓이니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미래의 나를 위해 남겨둔 기록일 텐데, 미래의 나는 정작 다시 눌러 그때의 감정을 읽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린 치기와 욕심도 거두고 미워하는 마음보다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12년 차에 들어선 우린, 지금 결혼생활의 황금기를 걷고 있는 듯하다. 예전보다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많다.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순 없고 아직은 한정된 부분들이지만 느슨해진 빗장 사이로 서로의 생각을 조심스레 교류하고 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 언젠가는 접근금지 구역도 해제될 날이 오지 않겠나! 원만한 관계의 시작은 기본이고 상식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감사함으로 재배치하자 생긴 일들이다. 우리 관계의 열쇠는 '인정'이었다. 상대가 하는 일에 대한 수고를 서로 인정하고 감사로 받아들이자, 마음이 열리고 그 열린 마음 사이로 웃음과 애틋함이 스며들었다. ‘고마워. 수고했어, 고생했네. 우리 신랑 덕분이야.’ 이런 몇 글자 되지 않는 말 한마디로 관계가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은 머리 싸매고 긴 편지나 이벤트를 준비하지 않아도 될 일이니 얼마나 반갑고 감사할 일인지!


글의 끝에 다다르자 드는 생각은 비단 신랑과의 문제 외에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감사하지 않은 것은 없는지 그로 인해 중요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자 생각한다. 또 열리지 않은 문은 맞지 않는 열쇠를 돌리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찾지 못하고 의미 없는 열심으로 마음만 애태우진 않는지. 그래서 포기하는 것은 없는지 말이다.그때의 메모 덕분에 오늘도 글을 하나 완성했다. 수일간 글을 맺지 못해 힘들어했던 악의 고리를 끊어낸 것 같다 다행스럽다. 글을 마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늘 쓰고 있음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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