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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둥이긴개 Feb 20. 2024

한밤의 슬픔과 꿈 (1)

술을 마시다

  한 주간 술자리가 없었다면 혼술이 땡길 때가 있다. 일주일 노동의 끝마침표인 금요일을 보내고 나에게도 토요일이 찾아왔다. 온종일 하루를 비추던 해는 창밖에 보이는 아파트 뒤로 숨었는데, 이윽고 나는 아끼던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예전에 따는 법을 몰라 낑낑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코르크 마개는 마치 해안가의 파도처럼 부드럽게 밀려 나왔다. 한 손으로 들어보다가 든 생각은 병이 좀 무거웠다. 잘 보일 사람도 없는데 그냥 공손하게 양손으로 잡아 잔에 붉은 와인을 흘려보냈다.

 


  적당히 채워지자 나는 가볍게 잔을 들어 회오리바람처럼 굴려보았다. 공기를 타고 코에 스며든 향은 의외로 산미를 기대하게 했다. 그것을 담고 있던 무거운 병과 괴리감이 느껴져 오히려 가볍게 느껴졌다. 아마도 나는 외관만 보고 묵직한 다크 초콜릿 향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병이 무거우면 맛도 향도 다크 할 거라는 편견은 어디에서 온 걸까? 아마 그동안 마셔왔던 술들이 그랬을지도. 



  이제 맛볼 차례다. 잡고 있던 손은 잔을 시소처럼 끄덕였고, 붉은 와인이 입안으로 줄을 지어 입장했다. 흠… 꽤나 묵직하게 느껴지는 맛이다. 그런데 산미도 뛰어나다. 아주 신 과일은 아니지만 마치 과일껍질, 이를테면 귤껍질이 생각나는 맛이다. 까지 않는 귤이 데굴데굴 혀에서 구른다고나 할까? 아주 인상 깊은 맛은 아니지만, 참 균형 잡힌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직함이 줄 수도 있는 지루함을 산미가 감싸 앉으면서, 저울질에 추를 맞춰주는 느낌이다.



  테이블에 비치된 안주를 하나씩 집어먹으며, 연거푸 잔을 들이켠다. 나에게 허락된 작은 행복, 머리에 지나가는 별바다를 흘려보내며, 문득 시음일지를 안 쓴 지 꽤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신 와인들의 맛을 기록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패드에 템플릿도 그려가며 시음노트에 열심히 필기했었는데, 요즘에는 마실 때마다 까먹는 건지 아니면 귀찮았던 건지 애용하는 아이패드이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시음노트는 시간의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이제 관뚜껑을 열고 일어날 때가 왔다.

 

  귤껍질에 체크하고 또 어떤 느낌이 나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상모 돌리기처럼 회전하는 잔에서 와인과 함께 내 생각도 빙빙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묵직함이라… 무거운 건 아령, 트럭, 몸무게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냥 평범한 과일도 아니고 굳이 귤껍질을 생각했을까. 이윽고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는 가죽이었다. 다시 향을 맡아본다. 희미하게 가죽향도 나는 거 같다.

 


  잔은 놀이터의 시소처럼 내 입으로 계속 끄덕였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병도 점점 가벼워져 이내 한 손으로 따를 수 있었다. 새로운 맛을 탐색하고 음미하던 즐거운 느낌과 생각이 쏟아지는 와인처럼 나를 적셔갔다. 한 달에 두세 번 마시는 게 자주 마시는 편인지 모르겠지만, 매번 새롭고 지루함이 비집을 틈이 없다. 허나 비워져 가는 병처럼 기쁨의 순간 또한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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