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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둥이긴개 Feb 29. 2024

라면 끓이기

  주말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불속으로 파묻혀 귀찮음과 싸우고 있다가 문득 배가 고파진다. 공복기는 점점 차오르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갑자기 햄버거가 떠올라 휴대폰을 켜고 배달 어플을 켰는데, 햄버거 세트는 1만 원 정도이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이 든 찰나, 배달비가 3천 원이다. 이 돈이면 편의점에서 불벅과 콜라를 사 먹어도 될 거 같은 돈이다. 이것저것 머릿속에서 소비의 합리성을 찾는 거 자체가 이미 납득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배달은 포기하고, 지도 어플을 열었다. 햄버거를 검색하니, 집에서 걸어가면 10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그 거리를 감수할 만큼 가야 하는 상황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가기에는 겨울의 이불속은 너무도 포근하였다. 외출은 귀찮고, 집에서 편하게 먹자니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깝다. 상자 안에 갇힌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나는 이불에 물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태를 확정 지을 수 없었다. 과연 이 인간은 오늘의 점심을 먹을 수 있을까?


아 귀찮다


  이내 뇌는 지쳐버렸다. 집에 뭐가 있는지 뒤지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슬라이드 치즈랑 맥주 몇 캔, 양념장... 그리고 끝이다. 맞은편에 있는 와인셀러도 와인만 채워져 있다. 김치냉장고도 아닌데 당연히 와인만 있어야겠지만, 괜스레 녀석이 한심해 보였다. 무능한 냉장고 녀석들! 


  하는 수 없이 주방 서랍을 열어봤다. 라면 몇 봉지가 굴러다니고 있다. 친구들이 놀러 올 때 사 왔던 봉지 라면이다. 그들은 나에게 손짓한다. 


  나는 고뇌한다. 소중한 주말의 점심 한 끼를 라면으로 때워야 하나. 하지만 하찮다고 하기엔 요즘은 라면값이 비싸졌다. 라면 사는데만 거의 천원돈이고, 분식집에서 사 먹어도 한 그릇에 4천~5천 원이다. 4~5백 원 했던 거 같은 녀석이 어느새 천 원까지 올라와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트에서 싼 봉지라면을 막상 살펴보면 5개입이 아닌 4개입 포장이다. 마치 고등학생 때 방학이 지나고 보니 훌쩍 커져있는 친구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냥 먹자


  선택의 여지는 없다. 냄비에 생수를 채우고 불을 올린다. 참고로 나는 물에 예민하다. 수돗물은 마시지 않는다. 몇 번 신장결석에 걸린 후, 면만 삶고 버리는 파스타 같은 경우가 아니면 생수를 쓰게 되었다. 물이 데워지는 동안, 라면을 감싼 비닐포장지를 손으로 뜯기 시작했다. 쉽게 뜯도록 나있는 톱선을 시작으로, 비닐은 일자로 찢어지기 시작한다. 깔끔하게 개찰구를 만드는 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건조야채는 미리 넣어도 상관없으므로, 우선 냄비에 넣어버렸다. 스프는 나중에 넣을지 지금 넣을지 잠깐 고민했다. 지금 넣는다면 물은 빨리 끓는다. 염분이 끓는점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면이 어느 정도 익을 때 넣으면 면발에 스프맛이 배어 나온다. 감칠맛이 좋아지지만, 나트륨을 많이 섭취하게 된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 요즘은 운동을 하면서 건강에 관심이 많아진 시즌, 아직 끓지 않은 물 위로 가루가 덤프트럭의 흙더미처럼 쏟아져내렸다. 


  이제 물이 끓기 시작했다. 봉지 안에 있던 면은 개찰구를 저항 없이 통과하여 부드럽게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개찰구가 어긋나 있다면 면은 거칠게 냄비물의 표면을 흔들 것이고, 이는 뜨거운 물이 손으로 튀는 불상사를 일으킬 수도 있다. 준비는 시작으로 연결되고 좋은 시작은 마무리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야기한다.


눈을 살며시 감는다

   이제부터는 고도의 기술이 맛을 판가름한다. 물의 부력 때문에 면의 윗면은 아직 공기와 닿아있다. 그렇다고 젓가락으로 꾹 누르면 냄비 바닥에 면이 탈 수도 있다. 방법은 하나, 면을 젓가락으로 꺼내고, 물에 잠겨있던 부분을 입바람으로 식혀주고 다시 뒤집어 넣는 것이다. 그러면서 면이 조금씩 풀어질 때마다 입바람으로 건조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왜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할까? 기본적인 취지는 면을 골고루 익히기 위함이다. 또한 아무리 시간을 잘 맞춰서 먹기 시작할 때는 면발이 꼬들 거려도 잠깐 지나면 불기 마련이다.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공기층과 왕복하면서 면의 탄력 유지 시간이 늘어난다. 보톡스 시술 같은 거랄까. 


  작게 끊은 면을 시험 삼아 먹어본다. 완벽한 탄력이다. 가스불을 끄고 밸브까지 잠가버린다. 냄비는 손을 따라 테이블로 직행한다. 설거지하기 귀찮으므로 앞접시는 사양한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면발은 후욱후욱 불어내며 열을 식힌다. 이윽고 입안에 들어온 녀석들을 한놈도 빠짐없이 소탕한다. 특유의 나트륨 맛이 혀를 스칠 때마다 윤활유처럼 침이 고이며, 부드럽게 삼킬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다 마시지는 않겠지만, 중간중간에 숟가락으로 국물도 먹어준다. 


  만드는 건 과정이지만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다. 면발이 텅 비어버리고 국물만 남은 냄비. 어릴 때라면 밥을 말아먹었겠지만, 이제는 탄수화물마저 조절해 가며 먹어야 하는 지나치게 많은 걸 알아버린 머리. 그렇게 국물을 떠나보내며, 한 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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