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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둥이긴개 Mar 07. 2024

날씨 풀리기 전에 풀어보는 스키장썰 (3)

  제대로 훈육을 받고 A자로 코스를 다시 한번 내려와 보고 어느덧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도 안 먹고 왔던 터라 배도 때맞춰 허기가 졌다. 우리의 고민은 케이블카를 타고 위에서 경치를 내려다보며 라면을 먹냐 아니면 편하게 아래 푸드코트에서 먹냐는 것이었다. 


  케이블카 대기줄을 돌아봤다. 아무리 봐도 각이 안 나온다. 저 줄이 사라질 때까지 배고픔을 참기는 힘들 거 같았다. 결국 우리는 스키와 막대기를 눈밭에 방치해 두고 딱딱한 스키화를 신은 채 사이보그처럼 푸드코트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점심은 나쁘지 않았다. 설원 한가운데서 짬뽕과 군만두라니, 스키장 푸드코트라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터인데, 음식 맛이 상당히 괜찮았다. 빨간 국물 속에서 홍합이 옹기종기 쌓인 작은 언덕 위에 올려진 새우는 국물이 잘 배어 감칠맛이 뿜어져 나왔다. 면 익기도 적당했고, 얇은 유리가 깨지듯 바삭한 군만두와 휘감는 탄수화물은 오전 스키로 지친 몸에 연료를 주입했다. 용평 스키장에 가서 불가피하게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면 짬뽕과 군만두를 추천하겠다. 


  좀 쉬다가 우리는 다시 나왔다. 이제는 중급에 도전해 보자며 케이블카로 이동했다. 케이블카 바깥에 달려있는 바구니에 스키를 끼워 넣고 막대기만 따로 챙겨서 탑승하는 방식이었다. 스키장에서 한 번도 케이블카를 탄 적이 없던 나에게는 생소한 즐거움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스키장의 풍경도 마음을 정화시켰다. 


  문제는 케이블카를 탔는데 한참을 갔다는 것이다. 물어보니 15분은 걸린단다. 그렇다면 도대체 중급 코스는 몇 미터라는 것인가? 조금씩 불안감이 가랑비에 몸이 젖어가듯 나를 적셔가고 있었지. 케이블카 바깥에 풍경은 내가 타고 내려갈 코스를 웹툰 미리 보기처럼 보여주었다. 누군가에겐 절경이고 나에게도 절경이겠다. 새하얀 경사로가 그림자를 지나 밝게 빛날수록, 내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며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오늘...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영원하길 바랐던 케이블카는 정상에 도착했다. 끝자락에서 펼쳐지는 새하얀 광경에 환호성을 지르는 친구들의 소리를 뒤로 나는 오직 가파른 경사만 눈에 들어왔다. 아... 어떻게 이게 중급자 코스라는 것인가? 당연히 경사는 직각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보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친구들을 따라 나는 낭떠러지에 바짝 섰다. 식은땀이 구멍 난 가스관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 친구는 미리 내려가 밑에서 나보고 내려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강은 없지만 왠지 그와 나 사이에 는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강의 이름은 필히 요단강일 것이다. 


주둥이긴개 훈련병!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출발합니다!


  농담 섞인 친구의 외침을 시작으로, 스키는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이 코스도 나에게 사랑과 자비는 없었다. 몇 미터 못 가서 나는 그냥 넘어졌다. 넘어진 것인지 아니면 미리 넘어지는 게 나아서 일부러 그런 건지. 다시 일어나 타고 내려갔지만 계속 넘어졌다. 가파른 밑을 내려다보며 나는 깨달았다. 


살아서 멀쩡히 가는 게 최선이다


  스키를 발에서 분리하고 팔로 감싸 안았다. 경사가 줄어들 때까지 그렇게 고난의 행군을 했다. 중간중간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남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즐기러 온 그대들과 다르게 나에게는 생존의 싸움이니. 그렇게 한 30~40분을 걸었던 거 같다. 쉬고 있던 친구들과 재회하고 마침 어느 정도 내려갈만한 경사가 되자, 그제야 다시 스키에 안착해 내려갔다. 


  그래도 여전히 경사는 가팔랐다. 터질듯한 다리 근육으로 A자를 유지하며,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아마 이 코스에서 내가 가장 느리게 내려갔으리라. 뒤에서는 후발주자들이 연달아 나를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성인보다 애들이 더 많았던 거 같다. 아이들이 저글링처럼 뒤에서 빠르게 오다가 벌처처럼 현란하게 벽을 타고 넘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스키는 왠지 근육으로 하는 운동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경험치가 좀 더 쌓여야 될 거 같다. 


새하얗게 불태워 버렸어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스는 마침내 끝이 보였다. 무릎의 도가니는 사골마냥 완전히 풀이 죽었고, 30대 첫 스키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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