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광고회사 차려본 썰

#0. 나는 왜 또 이런 푸념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나

나는 기획자이다. 나는 내 직업에 애정도 크고, 환멸도 크다. 나는 이 업계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디지털 에이전시에서 광고기획자(AE)로 이 일을 운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고,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지병도 얻었지만, 정말 행운 같은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만난 이상적인 선배들, 운 좋게 익힌 통합적인 사고방식, 조직 자체의 선도적인 역할 덕분에 이 회사를 나온 이후에는 브랜드 컨설팅부터 실제 제품이나 공간까지 만드는 참 좋은 회사에서 오픈멤버를 하며, 전설적인 어른들을 곁에서 모실 기회도 있었고, 내가 회사를 직접 차린 후에는 로컬리즘 기획이니, 문화 기획이니 하는 좋은 게 좋은 일들, 관/공의 신기한 일들, 공사판, '형님들 금융업(?)' 브랜딩부터 F&B 브랜드와 리테일/공간 기획과 제작, 최근에는 퍼포먼스 마케팅까지 온갖 광고/브랜딩/마케팅계의 이슈와 접한 일들을 아무런 허들 없이 편안하게 소프트랜딩 할 수 있었다. 지금 내 회사(파이브울브즈)를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그냥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기획' 정도로 에둘러 설명하는 이유기도 하다. (물론, 좋은 성과가 있었느냐- 라고 하면 그건 단 한 개도 아니다ㅎㅎ) 

다만, 이번 시리즈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내용엔 이런 특별한(?) 성격을 지닌 내 회사의 홍보라던지, 나라는 기획자가 어떤 브랜드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던지 같은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진흙탕 연병장에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하다가 정신차려보니 병장이 되었다- 같은 쌍팔년도 군대 이야기에 가깝다. '광고회사' 그리고 '기획자'라고 하는 사뭇 애매모호한 정의 사이에 숨은 각종 애환과 비련, 어쩌다 찾아오는 아주 찰나의 스쳐지나가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나처럼 수많은 유명 브랜드와 각종 경쟁피티를 뚫고 오면서도 어찌 성공한 캠페인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엉망진창 광고인이 대관절 어떻게 광고회사까지 직접 '혼자' 차려왔는지, 그 준비와 발족, 경영과 운영을 '혼자'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푸념 정도로 보아주시면 된다. 개중엔 이 업 자체에 대한 푸념도 있을테고, 특정 클라이언트에 대한 푸념도 있을테고(물론 브랜드는 감추겠지만), 혹은 구멍가게 사업가로써의 푸념일 수도 있다. 그냥 이런 이야기를 어딘가에 남겨두는 행위 자체가 돌이켜보면 큰 개인자산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과, 나중에 회사에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을 때, 신입사원 오티자료 정도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련한 망상, 혹은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는 오만 정도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 첫 글, #0화는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시작의 역할로, 기획서를 쓰면 보통 선배들이 '야 앞의 저 몇 장은 좀 날려라'고 일축할법한 '사족'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적당히 넘기셔도 좋다.

나는 양 팔에 총 네 개의 타투가 있다. 요즘은 안 그렇지만, 옷도 내 멋대로 입고 광고주 미팅도 가곤 했다. 그게 멋있는 줄 알고 그랬는데 가끔 돌이켜보면 낯부끄럽다. '첫 외부 미팅'에 설레인 나머지, 브랜드 BI컬러에 맞추어 위아래로 원색 정장을 입고 온 막내 AE를 보고 팀장님과 광고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신입사원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어떤 낯빛을 보여줘야 할까. 뭐 어쨌든- 광고회사를 직접 차려서 한다고 하면, 보통 이런 당연히 '쪼'가 센 캐릭터인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그러기를 기대하거나. 그런 청중들을 위해 나는 아래와 같이 내 약력을 소개하곤 한다.

"저는 고등학교를 자퇴했어요. 커트 코베인처럼 멋있는 거 하려고 어거지로 자퇴했는데, 막상 자퇴해보니 내가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기도 했고... 멋있는 건 나처럼 게으른 사람은 못 하는 일인 것 같아 한시 빨리 포기하고, 어거지로 몸부림을 쳐 나름 유명한 대학교의 법학과에 들어갔죠. 졸업할 때쯤 되어서는 그냥 갑자기 광고가 내 길인 것 같아져버려서, 고시니 로스쿨이니 대기업이니 쳐다보지도 않고 광고회사만 골라서 이력서를 써냈고, 그냥 첫번째로 합격시켜준 그 곳에서 광고계 생활을 시작했어요.  광고계에서 말하는 연차로는 7년차 정도 되었고(맞나?), 회사를 차린지는 2년 가량 되었구요,. 흔히 말하는 '두 주머니'는 3년차에 대리를 달고난 이후부터는 매일같이 차왔죠 ㅎㅎ 언젠간 회사를 차려야지- 언젠간 직접해야지- 같은 생각을 매일 했다. 외장하드 두 개를 꽉 채울만큼 기획서도 써봤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척, 회사에 아트디렉터 많은 척 하며 직접 디자인에 손을 대거나, 영상을 제작해 제안한 적도 있어요. 코딩 오류가 나면 직접 고치고, 개발자에게 의뢰해 받은 척 몇만원 더 받은 적도 있구요. 그렇게 구르고 구르다가 결국 지금은 이렇게 된 거에요"

어디어디 스타트업 멘토니, 문화기획자 모임이니 뭐니 하며 돈 없는 내 회사에게 백만원(세전ㅋ)이라도 쥐어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던 개업 초창기 시기에는 이런 자리마다 상갓집 개마냥 찾아가 뒷풀이 자리까지 꼭꼭 참여하곤 했다. 보통 뒷풀이 자리에서는 딱 여기까지만 준비된 약력을 말했다. 나오는 반응의 유형은 비슷하다. '와~ 이 분은 이 일이 천직인가봐'라거나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신 게 부러워요' 같은 반응들. 하하-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구멍가게에요- 죽지 못해 합니다- 같은 누가봐도 '겸손한 척'인 워딩을 나열하며 갈무리를 한다. 꼴에 지도 광고회사 대표라고 그런 '대외적 채널에서의 개인 브랜딩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준수해가며, 술자리에서도 영업을 멈추지 않는다. 

팩트를 좀 더 들여다 보자면, 저 신파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솔직히 이 일이 좋아서 시작을 했는데, 월급을 받은 매 월말마다 관두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내 회사라서 관두고 싶어도 못 관둔다. 관두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침잠도 많아서, 지방에서 출퇴근하는 게 너무 힘들기도 했고, 가뜩이나 미운털 비슷하게 회사에 들어갔는데, 지각하다 선배들에게 혼나느니 그냥 주변에서 대충 자고, 일도 드럽게 못하는데 일찍이라도 가자- 는 생각에 고시원, 찜질방, 5평 월세를 전전한 적도 있다. 크리스마스에 출근해서, 광고주 인턴의 개인 대학교 과제도 도와준 적이 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아서! 안 해주면 혼날까봐! ㅋㅋㅋ 당연히 마음 한 켠에서는 '나 유명 4년제 나왔는데, 내 대학 동기들은 다 돈 잘 버는데, 광고한다고 하면 엄마가 궁금해하는데, 이게 뭐야, 이런 게 광고회사야?' 싶은 생각에 진짜 군대만큼 가기 싫었던 적도 있다. 감정이 잠잠해질 때 쯤엔 연봉협상 시즌이 돌아왔던지라, 관둘 이유는 정말 주간행사처럼 있었던 것 같다. 

몸담았던 조직이 매우 지명도 높은 회사였던지라, 기라성 같은 브랜드들의 일도 많았고, 누군가의 꿈과 같은 브랜드의 큰 프로젝트에 투입도 되어봤고, 갖가지 경쟁PT도 유명한 선배분들과 함께 하며 정말 좋은 경험을 만들 수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맡은 몫이란 건 그냥 '사고가 안 나게 하는 일의 보조' 정도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짱돌도 있어줘야, 멋진 그림이 바람에 안 날라가고 잘 고정될 수 있다는 건 잘 아는데... 솔직히 어린 맘에 프로젝트가 끝나도 성취감은 전혀 크지 않았다. '휴, 이제 주말에는 좀 쉬나?' 정도의 안도감 정도는 생겼지. 게다가, TVCF닷컴이니 광고제니- 다른 광고회사에서 주목하는 레퍼런스니- 하는 입방아에 한 번도 올라본 적도 없고, 그냥 객관적으로 봐도 유명하다거나 엄청 성공했다거나 하는 캠페인을 만들어 본 적도 없었다. 회사를 차려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지금도 솔직히 그런 건 하나도 없다. 나를 수식하는 키워드는 보통 좋게 말해서는 '멀티플레이어', '단도리 잘 치는 애', '기획서 오사마리 할 줄 아는 애', '급할 때 필요한 소방수' 정도이지 내가 얻고 싶었던 '기획통'이나 '마케팅 천재', '몇 안 남은 진짜 기획자' 같은 건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없는 것 같다ㅎㅎ) 우리 엄마에게 공개하기 어려웠던 두 가지가 내가 '유명 광고회사 기획자'라는 멋진 할로겐 등잔 아래서 실제로는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비루한 내 월급이었으니 뭐.. 말 다했지 싶다. 당시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 정 붙일 데가 없어서, 자주 가던 각종 레스토랑/바/호프 등의 쉐프나 오너들과 친하게 지내곤 했었는데, 그 분들의 업장에 손님을 모시고 간다던지, 홍보를 해드린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현금은 아니지만 현금에 준하는 VIP대우를 받았는데, 이 걸로 부족한 생활비(밥 먹을 돈)를 많이 충당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물론 이 때의 경험이 지금의 파이브울브즈를 만들기도 한 거라, 오히려 매우 감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볼 수록 이 업엔 애증만 쌓여 있어서, 대체 왜 금방 안 때려치고 지금 광고회사까지 차려서 대표를 하고 있지? 같은 의문이 스스로도 '또' 들지만, 이 의문과 혼란이 지금의 이 자리(-라고 쓰고 '이 지경'이라고 읽는다)에 있게 했다. 사실, 정신을 차려보니 회사를 차려서 대표를 하게 되었다- 가 더 맞는 이야기이다. 대표가 뭐 별거 있겠나, 혼자 차렸으니 대표이고, 씨디고, 전략총괄이지 뭐 별거 있나? 그거 다 어떻게 해서든 꾸역꾸역 버텨내고 살려내고 하다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광고를 사랑했던 것 같고, 내가 '일이 되게 만드는' 기획자라는 사실에 여전히 큰 프라이드가 있지만, 솔직히 이 업은 나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처음엔 오기로 회사를 차렸다. '마! 함 봐 주라!' 같은 느낌. 지금은 어찌저찌 혼인신고서 도장은 찍었으니 잘 살아보자- 정도의 생각인 것 같다. 예쁜 아이도 낳고, 좋은 대학도 보내고, 건강하게 군대도 보내가며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내 형편 때문' 인 것 같아 열심히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그래도 회사 '닉값' 하겠다고 좋은 사람 긁어모아 너댓명 모인 깡패조직이 되었지만, 사실 두 주머니까지 더해서 3년을 3개의 이름을 돌려 써가며, 나름 광고회사 비스무리한 걸 해온 시간의 대부분은 그냥 혼자서 여러 역할을 하며 고군분투 했던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견적도 더 받아내고, 클라이언트도 안심시키기 위해, '회사'라는 구조를 만들어 팔아왔지만, 줄 인건비가 없어서- 사람을 뽑아서 오래 할 만한 일 자체가 없어서- 때로는 그냥 원하는 사람은 비싸서- 같은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여기저기 제작 동냥젖, 매체 동냥젖, 인맥 동냥젖 얻어가며 살아왔다. 이런 거 잘 하는 방법은 소개 못해도, '이렇게 하면 안 되더라' 같은 나름의 노하우(-라고 쓰고 애환이라 읽는다)도 추후 어떤 편에선 공유하고 싶다. 어떤 클라이언트는 정말 클라이언트 같은 소리만 골라 하더라- 같은 거라던지, 고작 7년차가 광고의 미래를 걱정하는 매우 우스운 소리라던지- 자본금 7만 8천원 정도로 광고회사 시작하는 법이라던지- 같은 썰들을 많이 풀어보도록 하겠다. 

원래 회사를 처음 차렸을 때엔, 한 2년차 꽉 채우고 '성공'하고 나면, 낭만 넘치는 로맨티스트 오빠의 소년만화 같은 성공기를 어딘가에 연재하고 싶었다. 그럼 누가 출판 의뢰도 하고! 유명 기획자가 되어서 강연도 다니고! 클라이언트가 절절 기고 길을 찾으면 '갈!' 하는 선문답도 좀 해보고! 근데 뭐...현실은 '광고'라는 마누라 눈치만 보고 사는 가장의 생존기 '아빠의 청춘'을 쓰게 생겼다. 무튼, 앞으로 어린 놈이 지 주제도 모르고 광고를 시작해, 죽니 사니 때려치니 마니 하다가 결국 지 주제도 모르고 광고회사까지 차려서 버텨온...그런 두서 없는 썰들, 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