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 '체실 비치(Chesil Beach)' 여행기에는 문학적 감상이 충만했다. 그러나 사실 체실 비치는 아주 긴 지구의 역사를 품은 곳으로 더 유명하다. 훨씬 높은 비율의 사람들이 소설 <체실 비치에서>보다는 영화 <쥬라기 공원>을 떠올리며 그곳을 찾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쥬라기 공원> 영화를 이곳에서 찍었다는 것은 아니다. 체실 비치가 위치한 인근 해안에는 지구의 중생대 시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구의 오랜 역사를 품은 잉글랜드 남부 해협, ‘쥐라식 코스트’
영국 잉글랜드 남부 해협은 지구의 중생대 시기, 그러니까 공룡이 살았던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 시대의 암석을 볼 수 있는 해안으로, ‘쥐라식 코스트(Jurassic Coast)’라고 불린다. 잉글랜드 데번(East Devon)주의 엑스머스(Exmouth)에서 도싯(Dorset)주의 스터드랜드 만(Studland Bay), 그 사이 약 154km에 이르는 해안이 이에 해당한다.
< 영국 잉글랜드 남부 해협의 '쥐라식 코스트' >
< 영국 전체 지도에서 본 쥐라식 코스트 >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세계자연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쥐라식 코스트에는 긴 세월 동안 자연적으로 형성된 절벽, 아치, 만 등 독특하고 특이한 지형이 많아, 영국에서 아주 인기있는 여행지이다.
100km가 넘는 긴 해안 곳곳에 중생대 암석 절벽이 있고, 해변에 중생대 화석이 여전히 남아 있어 매년 화석 축제가 열리는 해안 도시 라임 레지스(Lyme Legis), 천연 암석 아치인 더들 도어(Durdle Door), 거의 원형에 가까운 ‘만’의 형태를 띈 룰워스 코브(Lulworth Cove) 등도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난 편에서 본 체실 비치와 그 옆 포틀랜드 섬 또한 중생대 시기에 형성된 지층을 보여주는 곳으로, 포틀랜드 섬은 석회암 암석 절벽으로 유명하다.
< 화석의 도시 '라임 레지스'의 해안 절벽과 화석 >
< 천연 암석 아치인 '더들 도어'와 원형의 만 '룰워스 코브' >
< 체실 비치 옆 포틀랜드 섬의 석회암 절벽 >
여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영국의 여름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쥐라식 코스트를 따라 걷기 위해 도싯(Dorset)주를 찾는다고 한다. 나 역시 영국에 도착한 그해 여름에 가족들과 도싯으로 짧은 주말 여행을 갈 기회가 있어 쥐라식 코스트의 일부 지역을 직접 보고 걸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 볕 아래서 해안을 따라 걸었다면,다음으로 맥주 한 잔을 떠올리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특히나 펍의 나라 영국이니 말이다.
도싯 해안 끝자락의 펍, ‘The Square and Compass’
쥐라식 코스트의 동쪽 끝인 스터드랜드 만을 지나, 쥐라식 코스트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워스 매트라버스(Worth Matravers)’라는 지역 나온다. 어디쯤인지 참고하기 위해 지난 편에서 본 체실 비치와 쥐라식 코스트의 동쪽 시작점인 스터드랜드 만을 함께 표기한 지도를 아래 붙인다. 워스 매트라버스는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 워스 매트라버스 위치 (출천 : 구글 지도) >
이 워스 매트라버스의 끝자락, 푸르게 펼쳐진 들판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펍, ‘The Square and Compass’. 독특한 지형의 해안과 맥주를 사랑한 사람들의 발길이 찾아낸 보석인지, 아니면 보석을 찾으러 오다가 해안산책까지 하게 된 것인지, 무엇이 주된 일인지 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근사한 보석 같은 펍이다. 이 먼 곳의 펍을 어떻게 찾아갔는고하니, 남편의 영국인 지인이 도싯으로 여행을 간다면 꼭 한 번 가보라고 강력하게 추천한 곳이었다.
< 출처 : Square & Compass 펍 홈페이지 >
워스 매트라버스 자체가 아주 특별한 명소가 있는 곳이 아닌, 그냥 작은 동네라서, 네비게이션을 따라 가는 길이 아주 좁고 구불구불했다. 도대체 어디에 펍이 있는 것인지, 좀처럼 예상이 되지 않는 길을 달려 거의 초원과 외딴 창고 같은 것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네비게이션이 안내를 종료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서도 펍이 보이지 않아, 다시 한번 위치를 확인하려고 핸드폰 화면을 켰는데, GPS가 우리의 위치를 프랑스 북부의 모 지역으로 잡았다. 헛,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온 것인가!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서 있으니 프랑스 북부에 가까워져 GPS가 잠시 위치를 헷갈린 것 같다.)
< 펍은 어디에 있는가!? >
주차장 앞 좁은 길을 꺾어 옆으로 들어가자, 북적북적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가 찾던 펍, ‘The Square and Compass’도 보였다.
이 펍은 18세기에 지어진 주택을 펍으로 운영하고 있어, 건물 내외부에서 빈티지한 감성이 넘쳐 흘렀다. 펍 앞 마당에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과 벤치에 앉아 공연을 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펍 입구는 맥주와 음식을 주문하는 사람들로 줄이 길었다. 이 펍으로 오기까지의 길은 지루할 만큼 조용했는데, 이렇게 반전처럼 유쾌하고 생기 있는 펍이 숨어 있었다니! 집 근처 동네 펍에서 술을 마시는 영국인들도 항상 즐거워 보이지만, 누가 봐도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여행자들이 모인 해안 절벽가 외딴 곳의 펍은 보통의 펍과는 다른 느낌으로 흥겨워 보였다. (이런 야외공연과 분위기는 여름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겨울에 이곳을 찾는다면 보다 차분한 펍을 만날 듯하다.)
추천은 받았지만 어느 정도의 인기인지 몰랐던 남편도, 남편이 가자니까 별 생각 없이 따라 갔던 나도,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구글로 검색을 해 보니 범상치 않은 이 펍은 도싯을 찾는 여행자들의 핫플레이스 같은 곳이었다.
<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대기줄을 감내해야 하는 인기 펍, Square and Compass >
영국의 펍에서는 그 지역에서 생산된 맥주, 특히 에일 맥주를 제공한다. (모든 펍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긴 유통 거리 없이 만날 수 있는 싱싱한 로컬 맥주가 맛있는 것은 당연한 일. 거기에 더해 이 펍은 고기 파이가 맛있다고 했다. 빵 반죽에 다진 고기를 넣어 구운 고기 파이. 외국 동화책에서나 봤던 고기 파이를 우리도 시도해 보았다. 사실 피하고 싶었지만, (고기가 든 빵이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고기 파이 말고는 주문할 수 있는 음식이 별로 없었다. (구글 후기를 보건데 이 펍의 유일한 단점 같은 느낌이다.)
대기 줄이 긴 만큼 박진감 넘치는 속도로 진행된 음식 주문을 무사히 마치고, 맥주와 고기 파이를 손에 들었다. 생김은 먹음직스러워 보였으나, 역시나 우리의 입맛에는 맞지 않던 고기 파이. 고기를 좋아하는 첫째 아이도 고기 파이는 수용할 수 없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몇 입 먹다 그만 두었다. 이 펍의 고기 파이 자체가 맛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고기 파이 자체에 대한 불호였으니 오해는 하지 마시길. 이곳을 추천해 준 지인 포함 많은 이들이 이 펍의 고기 파이를 찬사하는 말들을 남겼다.
< 이 지역 맥주와 고기 파이 >
고기 파이와 달리, 오래된 펍의 빈티지한 공기와 함께 마시는 맥주 맛은 너무나 깊었다. 낡았지만 지저분하지 않고, 노란 색감의 벽과 엔틱 소품들이 낯선 곳의 설렘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 언제나 옳은 맥주 한 잔! >
< 빈티지한 분위기의 펍 내부 >
< 열린 창문으로 들려오는 야외 공연 음악 >
맥주를 마시는 동안 열린 창문으로 펍 마당의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쿵딱-쿵딱-쿵딱,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몸이 절로 반응해 흥 많은 둘째 아이와 함께 의자에 앉아 가볍게 춤을 추었다. 별천지 같은 공간 속에 스미는 음악과 맥주의 기운이 바로 여행인 것 같았다.
< 야외로 나와 사람들 사이에 앉아 보았다. >
음악도, 맥주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 펍의 백미는 펍 앞마당 너머로 쫙 펼쳐진 초원과 바다였다. 실제로 이 뷰와 트레킹 코스가 좋아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맥주를 다 마신 뒤 우리도 펍을 나서 초원에 난 산책길을 걸었다. 탁 트인 들판이 싱그러웠다.
< 펍에서 작은 길 하나면 건너면 걸을 수 있는 해안 산책로 >
초록빛 들판 위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양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하게 산책하라는 안내문에 따라, 양 옆을 지날 때는 특히나 소곤소곤 대화하며 걸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산책로 위의 양들은 사람이 지나가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바로 옆에서 보는 자연 속의 동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가 쭈뼛쭈뼛 긴장했다.
< 풀을 뜯고 있는 양들 >
< 들판에서 바라본 마을, 사진의 왼쪽에 있는 집이 Square & Compass이다. >
바다가 눈 앞에 바로 펼쳐진 듯 보이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꽤 오래 걸어 해안 절벽에 닿았다.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절벽이 이곳에 쥐라식 코스트라는 이름을 붙여준 중 중생대 시기 석회암 절벽이었다. 과연 많은 이들이 애써 찾을 만한 풍경이었다.
< 도싯 해안 끝자락에서 만난 쥐라식 코스트의 해안선 >
< 눈과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도싯 해안의 풍경 >
강하게 부는 바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들판과 바다 풍경에 마음이 뻥 뚫리는 듯 시원했다. 동시에 펍에서 들었던 흥겨운 음악의 여운도 아직 남아, 바람을 타고 날아갈 듯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이런 홀가분함을 느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싯의 해안을, 이 펍 ‘The Square and Compass’를 찾아오나 보다.
영국의 동네마다 수두룩하게 있는 펍이지만, 이렇게 여행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펍도 매력적이었다. 영국의 곳곳을 다니며 많은 펍을 다녀본 바, 영국의 펍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지역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 영국 지방 여행을 한다면 그 지역만의 유서 깊은, 또 취향에 맞는, 혹은 독특한 펍을 찾아 떠나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