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 ‘잉글랜드 남부 해협 쥐라식 코스트와 그 끝자락의 펍’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 글이 처음인 사람을 위해 한 번 더 설명하면,
영국 잉글랜드 남부 해협에는 지구의 중생대 시기(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의 암석을 볼 수 있는 ‘쥐라식 코스트(Jurassic Coast)’가 있다. 잉글랜드 데번(East Devon)주의 엑스머스(Exmouth)에서 도싯(Dorset)주의 스터드랜드 만(Studland Bay), 그 사이 약 154km에 이르는 해안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영국의 일 년 중 날씨가 가장 좋은 계절인 여름에 해수욕과 해안 트레킹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인기가 많은 여행지이다.
<지난 편에서 봤지만, 한 번 더 보는 잉글랜드 남부 '쥐라식 코스트' >
< 워스 매트라버스에서 바라본 쥐라식 코스트. 이런 느낌이다! >
쥐라식 코스트에는 긴 세월 동안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 절벽, 천연 아치 더들 도어(Durdle Door), 원형에 가까운 ‘만’의 형태를 띈 룰워스 코브(Lulworth Cove), 아직도 해변에서 화석을 발견할 수 있는 라임 레지스(Lyme Legis) 등등 독특하고 특이한 지형이 많은데, 쥐라식 코스트의 진가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우리는 짧은 여행 일정으로 떠났고, 시간 관계상 모든 지형을 둘러볼 순 없어서 그중 룰워스 코브를 골라 직접 보고 왔다.
쥐라식 코스트의 동쪽 끝인 스터드랜드 만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지난 편에 본 ‘The Square and Compass’ 펍과 해안 산책로가 있고, 거기에서 시원한 맥주와 바닷바람으로 목을 축인 뒤 다시 왼쪽으로 더 이동하면 석회암 해안 절벽과 독특한 중생대 지층들이 쭉 이어져 있다. 그 중에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양의 ‘만’이 있다. 룰워스 코브다.
< 앞서 소개한 '체실비치'와 '워스 매트라버스' 사이에 위치한 룰워스 코브 (출처 : 구글 지도) >
룰워스 코브 인근의 큰 주차장에 차를 대고, 룰워스 코브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특이할 것 없는 작은 시골 길이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은 여행자들을 부르는 음식점들이 곳곳에 있었고, 그보다 더 여행자들의 눈길을 잡는 해바라기 꽃이 어여쁘게 피어 있었다.
<룰워스 코브로 향하는 길에 핀 해바라기 >
우리처럼 룰워스 코브를 찾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바다를 향해 난 좁은 길을 걸으며,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길 끝에 그렇게 특별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즈음 시야가 넓어지며 바다가 나타났다. 목이 길고 좁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물을 쏟아낸듯 길 끝에 정말 동그랗고 예쁘게 다듬어둔 인공의 호수 같은 바다가 있었다.
< 해변에 서서 바라본 룰워스 코브. 해변에 서서는 둥근 형태가 렌즈에 다 담기지 않았다. >
< (참고용) 룰워스 코브 전체 모습을 담은 항공 사진. (출처 : 구글) >
잠시 저급한 지식 수준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한 룰워스 코브 형성 원인에 대해 설명하면, 룰워스 코브의 둥근 만 가운데 부분 지층이 바다와 닿는 부분의 지층보다 침식에 약한 성질의 흙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가운데가 더 많이, 빠르게 침식되어 생겨난 지형이 룰워스 코브이다. 이런 지형이 다른 지역에도 있지만 이 잉글랜드 남부 해협의 룰워스 코브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고 한다.
< 룰워스 코브 형성 단계. 시간이 갈수록 초록 부분이 더 깎여 원형에 가까워지는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
바다와 통하는 길의 8할을 막고 있는 형태의 양쪽 언덕 때문에 룰워스 코브 내부의 바다는 파도가 거의 치지 않고 잔잔했다. 동그란 만 가운데 둥둥 배가 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카약을 타고 만의 입구 쪽으로 향하는 모험가들도 있었다. 물이 깊지 않은 지 맨몸으로 유유히 수영을 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우리도 시간을 넉넉하게, 또 미리 수영 준비도 해 왔다면 이 흔치 않은 바다에 몸을 적셔 보는 호사를 누렸을 텐데. 풍경이 근사한 만큼 아쉬운 마음도 컸다.
< 잔잔한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배들 >
< 룰워스 코브를 온몸으로 즐기는 사람 >
룰워스 코브의 양쪽 언덕 방향으로는 언덕 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 그곳에 오르면 룰워스 코브 전체를 관망할 수 있다.
< 흰 원으로 표시해 둔 언덕을 말한다 >
< 두 언덕 중 오른쪽(위의 사진 상 위쪽) 언덕에 오르는 중 >
별로 높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산책로에 올랐는데, 정상에 오르니 언덕 바깥 쪽 뷰가 아찔했다. 그러니까 만을 향한 면 말고 넓은 바다를 향한 면, 그곳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그런 절벽 길에 난간이나 로프 같은,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었다. (영국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참 좋아하는 듯하다.)
< 평화로운 룰워스 코브 풍경과 대비되는 바깥쪽의 사정 >
점점 더 좁아지는 언덕 끝자락까지 올라선다면 성취감은 있겠으나, 나의 간은 차마 그렇게 크지 못했다. 발을 헛디뎌 바다로 추락하진 않을까 오돌오돌 떨며, 그래도 절벽 아래 바다를 한번은 보고 싶어서 기다시피 끝자락에 다가가 내려 보고는 빠르게 후퇴했다.
반대로 돌아 서서 룰워스 코브에 집중하는 시간.
높은 곳에서 내려 다 보는 만은 더욱 동그랗다. 이런 지형으로 변형되기 전,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같은 해안 끝의 땅이었을 텐데 속을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어, 똑 같은 풍랑에도 이렇게 다르게 깎였다. 마치 같은 환경, 같은 자극, 같은 요인에도 저마다 다르게 반응하고, 변화하는 사람의 모습과 닮은 듯도 했다.
< 언덕에서 내려 다 본 룰워스 코브의 완만한 원형 >
룰워스코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양쪽 언덕이 두 팔이 되어 가운데 찰랑찰랑 고인 만을 꼭 품고 있는 형상이다. 오랜 풍랑에 시달리며 더 많이 깎인 이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머금자, 조금 더 단단한 이가 든든하게 감싸 안아주는 방식으로 긴 시간을 버텨온 룰워스 코브. 흐림과 맑음을 반복하던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햇살을 내리쬐자 둥근 만이 더욱 평화롭고 따스하게 다가왔다.
< (참고용) 정면에서 내려 다 본 룰워스 코브 사진. 양팔로 가운데 만을 꼭 품고 있는 것만 같다. (출처 : 구글) >
인간의 생이란 자연보다 훨씬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 때와 상황에 따라 가끔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머금는 입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든든하게 감싸주는 존재가 되어주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 안쪽에서 위로를 받을 땐 감사할 줄 알고 바깥에 서서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줄 땐 생색내는 일 없이 묵묵하게 생의 풍랑을 맞는다면, 룰워스 코브만큼의 완벽한 원형은 아니라도, 우리 역시 더불어 함께 둥글둥글 완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행에서, 또 자연 앞에서 무엇인가를 꼭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의 긴 역사를 간직한 잉글랜드 남부의 도싯은 가볍게 찾아간 걸음에도, 가득 찬 마음을 되돌려주는, 아주 깊고 진한 여름의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