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디자인창의력_02
일본에서 공부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디자인 실기과제를 하는데 나름 실무를 7년간 했었고, 그림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들은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들도 있어 이론 수업이야 언어가 문제 되어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실기는 나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담당교수에게 보여줘도 자꾸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를 그렇게 힘들게 진행하고 있었는데, 다른 일본 학생이 검사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일본 학생은 갱지에 아무렇게나 끄적인 것 같은 그림을 내밀었고 담당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행해 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나는 깔끔한 렌더링을 항상 수십 장 준비했는데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안 된다고 하더니, 일본 학생은 불과 몇 장 그것도 잘 알아보기도 힘든 스케치를 내밀었는데, 오히려 그 학생은 통과되고 나는 안 된다고 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터라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지도교수가 나에게 ‘네 그림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의미가 내가 그린 그림과 같은 것을 다른 데서 본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조형의 이미지 즉 디자인 양식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뒤통수가 뭔가에 의하여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나 돼? 가능한 이야기야? 하는 의구심 및 반발심과 아! 내가 그런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구나 하는 복잡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는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대상과 구현해야 하는 이미지가 정해지면 여러 좋은 조형을 조사하고, 그 요소들을 재구성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교수의 말대로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본 적도 없는 디자인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해보니 많은 디자인을 접하면서 본 적도 없던 경우가 의외로 많았던 것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멤피스 디자인그룹의 디자인이 그랬고, 지금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바우하우스의 디자인도 당시에는 본 적도 없는 디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본 적도 없는 디자인들을 의외로 많이 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를 위의 그림에서 설명한다면 내가 그때까지 생각했던 새로움은 이미 있던 유형 속에서 새로운 조각 하나를 만들어내는 A5나 B7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지도교수는 C를 만들어 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 잡고 있는 A나 B의 유형도 언젠가 A1이나 B1이 생겨나고 그것이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A2, A3등이 생겨나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C가 언젠가는 C1이 되면서 C2, C3가 생겨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우리가 흔히 듣는 음악 중에서 재즈라는 것도 누군가가 언젠가 처음 만들었을 것이며,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누군가가 처음에 만든 것일 것입니다.
힘들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주변에서 전혀 새로운 C를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새로운 D, F를 만들어 내려고 고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새로운 조각이 아닌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새로움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