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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gonus 아빠토마스 May 06. 2024

즐겁게 연습할 수 있는 낭만

연주는 왜 힘들면서도 기쁜가?


지휘로써 연주에 참여하면서

정말 다양한 음악가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본인의 문화를 최전선에서 다루는

유럽 출신인 몇몇 내 음악 동료들부터

지금까지 만나왔던 한국과 국외에서

음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활동의 횟수와 양에 관계없이

모두 최선을 다하며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동료의 도움 없이 무대에 서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관객들의 반응에 민감해지고

자신의 연주에 책임감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며 돌이켜 생각하고

연주활동을 지속하며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면 악보에 대해,

작곡가에 대한 깊은 공부에 대한 열망이 생긴다.

순서가 거꾸로 되어있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연주 능력을 증진시키기 쉽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지식과 해석보다

악기를 다루는 데 필요한 모든 기술력과 표현법을

먼저 배우는 건 어쩔 수 없는 당연함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국제 콩쿠르 우승자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커리어를 가진 연주자는 아니지만,

국제 콩쿠르에 참여하며 만난 연주자들,

유학하면서 겪었던 동료를 포함한 음악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한편으로 안타까웠던 점은

모든 연주가 ‘나’를 향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낭만 시대의 음악에서는

그 단어인 낭만이 주는 의미 때문에

자주 오해하고 도취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악보를 읽고 연주하는 방법을

배우는 이유도 이런 오해와 도취에서

벗어나야 작품의 진실된 의도를

오롯이 연주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주로 전달한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연주자도 있겠지만

우리는 책 읽어주는 사람이지 그 책의 저자가 아니다.

책을 구입해서 가질 수는 있지만

작가가 몇 달, 몇 년을 고민하며

고치고 고친 글을 내가 읽고 말하기 편한 대로

단어를 바꾸거나 문장을 생략할 수 없다.


음악이면, 예술이면 행위자가

자유로워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수도 있다.

맞는 것 같지만 적어도

예술가(작곡가)의 작품을 재연하는 사람에게 자유는

당연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제약의 테두리를 느껴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연주는 작품의 주인은 곁에 세워두고

그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연주한 거다.


가끔씩 음악가가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연주의 행위와 의도가

그저 ‘나’에게만 향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전, 낭만, 근현대는 시대를 구분 짓는 의미이지만,

작품을 남기는 예술가들이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 그 자체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받았던 사회적인 제약이나

그가 처했던 상황도 알아야 하지만

이런 모든 틀과 자신만의 개성 사이의 틈에서 일어나는

말랑말랑한 자유도 엿볼 수 있어야 한다.


낭만주의 작품은

내 낭만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작품 주인의 낭만을 표현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와 성격도 인종도 다른 예술가를

최대한 밀착해서 의도를 알아내고

최선을 다해 비슷하게 구현해서

전달해야 할 의무가 연주자에게 있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와 전혀 다른

타인의 자연과 규율에 맞추는 건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작품이라는

최소한의 공동 구역에서 타협점을

찾는 건 그나마 조금은 수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은 그 시작이 주술이고 제사였으며,

지배층의 문화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에는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한계에 부딪혀 왔다.

정확히는 많은 이들의 공유가 필요 없는 문화였다.

(하지만 귀족의 신분이 아니었던 작곡가와 음악가들의

수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야 했다)


눈이 아닌 귀로 즐기는 클래식 음악은

수익 창출에 최적화된 문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이 해결되어

이런 문화를 보존하는 음악가들에게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고,

클래식 음악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 음악가들에게는

이를 수용하고 재미를 느끼고 싶어 하는

관객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결국 여기서 ‘나’를 위한 부분은

생각한 것보다 매우 작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추구했던 재미의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나에게 할당된 작은 부분에서 주는 즐거움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클 수 있다.


그저 무대에 올라서

연습실에서 고생했던 흔적을

모조리 쏟아내고서 받는

관객들의 박수에

위로받는 나의 낭만에 위로받기보다,


작가만이 가진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낭만시대를 이해하고 표현해줄 수 있다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즐겁고 값지게

공연 준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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