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by dynamicyun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사실 모든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누군갈 만나서 웃고 대화하지만, 속에선 온통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가득합니다.
지루하고 지겹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이 사람과 왜 이런 대화를 해야 하는지
이 만남이 이 관계가 이 거지 같은 세상이 돌아가는 데에 어떤 소용과 연관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지인이라면 조금은 놀랄지도 모르겠으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무섭습니다.
사람이 두렵고 귀찮습니다.
사회 속,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면
무언갈 떨어트려 온통 다 깨트릴 것만 같아 겁이 납니다.
실수를 연발하고 실언을 남발할 것만 같습니다.
손에 쥐고 있지도 않은 핸드폰이 허벅지에서 계속 울려댑니다.
그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면 누군가가 죽음을 이야기할 것 같고,
어느 신용정보회사에서 연체를 외쳐대며 저에게 독촉할 것만 같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전에 제가 했던 모든 실수와 실언
철없던 행동과 남에게 상처를 줬던 그 모든 일이
아주 선명히 날아와 제 가슴에 박힙니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가슴속에서 비명을 질러도
그 기억은 지워 지지도 잊히지도 않습니다.
그 후엔 내면속 누군가가 계속해서 외쳐댑니다.
그냥 죽으라고, 그냥 죽어버리라고
다 포기하고, 변명 따위 하지 말고, 나가떨어지라고 합니다.
오늘 네가 한 일들을 봐라, 네가 한 말들을 되짚어봐라.
비겁하고 치사한 인간이 겨우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안에 틀어박혀서
글이나 끄적이는 게 전부인데,
네가 세상 밖으로 나가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저 자신을 힐난합니다.

살고 싶어서 책장을 해짚어 놓고 여기저기 페이지를 넘겨보며 찾아봅니다.
성경책이고, 철학책이고 그 안엔 분명 진리와 대답이 있겠죠.
내가 왜 힘든지, 내가 왜 고통스러워야 하는 건지
왜 허탈하고 허무한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답이 존재하지만,
고통스럽고 죽고 싶은 제 하루와 일상 앞에선 그저 활자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 답을, 그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오늘의 고통과 괴로움이 지워지거나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실을 깨달은 채로 고통스러워야 할 뿐인 거죠.

그래서 매번 이상적인 세상을 꿈꿉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저 자신을 당당히 소개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경쟁도 없고 순위도 없는, 낙오자나 패배자가 없는 그런 세상
장애인의 몸짓에서 매력을 느끼고
그들과 친구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을 기준으로 정신과 약을 먹지 않아도
온전한 정신으로 사람을 만나고 노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떠올립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재력과 자산이 나의 노력과 열심이 되어버린 세상과
가지지 못한 자의 노력은 매번 허공을 치고 그래서 결국 게으름뱅이가
되어버리는 그런 세상을 증오합니다.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들은 엘사가 되고,
그 얼음공주의 아빠는 이백충 삼백충 벌레가 되어버린 그런 세상이 아니라
월급봉투의 두께와 상관없는,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손가락질받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그려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올까요.
전 그런 세상이 올 거라 믿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저의 염세적인 생각이
얼굴 시커먼 제3의 누군가가
저 밑에서부터 꿰어나간 서슬 퍼런 공작이라면.
세상 사람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많은 것들이 제한된 세상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반대로 위에서 나열한 이상적 세상이 실제로 도래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나의 하루가
우리의 일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 쓸데없는 종이 뭉치를 만들면서
그런 세상을 꿈꿨고, 실제로 며칠 간은 그런 상태에서 살아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얼굴에 냉수마찰을 하고 양말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나갈 사람은 바로 이 책을 쓰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나’라는 존재임을, 그 당연하고도 본질적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억만 겹의 시비와 푸념을 밀어내고,
그 치밀한 공작 속에, 산더미 같은 자책과 자조를 뚫고
인생을 살아 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치밀한 공작을 뚫고 무엇을 얻었냐 하면,
이상적인 세상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저는 이 책 한 권을 얻었습니다.
저는 비록 제 얼굴 크기보다 작은 책 한 권을 얻었지만,
여러분은 이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멋진 세상을 얻어내는 사람이 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느 기업의 좁쌀만 한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해 방구석에 틀어박힌 청춘으로,
전투 같은 육아를 하거나 3남매를 키워내야 하는 누군가의 부모 된 모습으로,
혹은 육탄방어의 워킹맘으로,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사직서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으로,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파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던 누군가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못난 짓을 했던 과거의 내 모습으로, 그 영겁의 고통과 무게를 한 몸에 짊어진 채로
우리 가슴속 깊숙이 존재하는 그 누군가의 공작과 시커먼 검은 속내를 뚫고 이겨냅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가슴속 깊이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며 살아갑시다.

그래서 마침내 길가다 150만 원이 들어 있는 지갑을 찾아주고,
퇴직하고 방황하는 아버지의 핀잔과 역정을 감싸 안고,
직장 동료의 실수와 실패를 함께 떠안고,
전 재산 50,000원을 리어카 할아버지의 손에 쥐여 드리고,
우울증이란 핑계로 아무런 일도 못 하는 사위 새 운동화를 사주며 그렇게 살아갑시다.

우리의 이상적 세상은
결코 어떤 위대하고 거대한 무언갈 해내야 도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문제들
어렵고 힘든 주변 사람들을
감싸 안고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저대로 위에서 언급한 내면속 누군가와
치열히 싸우며 넘어지고 실패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걷어내고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며
사랑하는 아내와 반려견 빙봉이와
이 비겁하고 말도 안 되는 세상을 아주 단출하고 일상적인
일들을 해내며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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