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 집으로 퇴근한 첫날, 새집은 작은 산 언덕배기에 있다. 아파트 입구에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오면 비로소 나의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로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고, 한 동 안에 세대수가 많지 않아 사람 사는 곳 같지 않고 조용하다. 베란다 바깥으로는 산새도 보이고, 왠지 공기도 조금 다른 것 같다.
자는 방과 쓰는 방이 한데 있었다면, 지금은 자그마한 서재도 하나 생겼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책상과 소파, 책장이 놓여 있는데 나는 단연 이 공간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많이 읽고 쓰자고 다짐하면서.
그러나 자꾸만 옛날 집이 아른거리는 건 내가 그곳에 오랫동안 내리고 있던 깊은 뿌리 때문이다.
햇수로 따져보니 그 동네에서 만으로 스물한 해를 살았다. 말괄량이 삐삐 시절부터 철이 든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서까지 한참을 산 것이다. 같은 아파트 안에 친구들이 여럿 살았고, 우리는 함께 등하교를 하며 신발주머니에서 용돈을 꺼내 맛있는 것을 서로 사주기도 했다. 단지 안 놀이터에 숟가락을 묻어두고, "이건 보물이 될 거야!" 외쳤으며,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난 밤이면 약속한 듯 하나 둘 집을 나와 집 앞 배드민턴 코트에서 공을 찼다. 짝사랑하던 선배와 그네에 나란히 앉아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스무 살이 된 날에는 친구와 집 앞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닥칠지 까맣게 모르기도 했다. 울면서 집을 나와 전화를 걸면 달려와주는 이가 있었고 현관 앞에서 나를 꼭 안아주고 뒤돌아서는 친구가 있었다. 흰 눈이 엷게 내리는 날 아파트 안을 몇 바퀴고 함께 걸어준 성현이 있었고, 우편함에 몰래 편지를 넣어두고 간 아라가 있었고, 담을 잘 넘는 법을 알려준 수현이 있었다.
최근 몇 년간 그 집에 사람들이 특히 많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내 친구이기도 했고 오빠의 친구이기도 했으며 엄마, 아빠의 친구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집에서 모두 친구가 되었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하하 웃다가도 어떤 화제가 등장하면 피를 토하며 논쟁했다. 내일이 오늘이 되고, 오늘이 어제가 될 때까지.
지금, 주인 없이 덩그러니 있을 옛날 집이 무척 그립다. 혼자 밝아지고 어두워질 텅 빈 곳. 생각해보면 사람이 아닌 것을 이토록 그리워한 적이 없다. 내가 낳고 버린 아이처럼 미안해지고, 또 고마워지고 더더욱 잊을 수 없어진다.
그러나 우리 손으로 아름답고 밝게 꾸민 새집이 나는 벌써부터 좋다. 이곳에서 벌어질 일들을, 이곳에 찾아와 줄 이들을 나는 먼 과거의 일처럼 대하겠지만, 분명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건강하고 온전하게 새로 다가올 것들을 받아들이고 싶다.
덜 아프고 더 많이 사랑받고 싶다. 사랑하겠다는 말보다 사랑받겠다는 마음이 필요한 계절이다. 그 소망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