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찬찬한 채비를 했다. 유독 시간이 잘 가지 않았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엄마에게 마트에 가자고 했다. 마트에 가서도 사야 할 것이 눈에 들어오긴커녕 초침을 타고 사라지고 싶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연유를 알 수 없어 그 길로 기차를 타러 역으로 출발했다. 담배를 여러 대 피웠으나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서울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미용실로 향했다. 해가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한낮이었고 창가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으니 그냥 좋았다. 머리를 해주는 참한 사람이 나지막이 내게 일을 하러 가느냐 물었고, 나는 "오늘 쉬는 날이에요." 답했다. 무언가 덧붙이고 싶었으나 혹여 내가 가진 행운이 조금이라도 날아갈까 싶어 그러지 않았다. 숲길을 조금 걷다가 전철을 타고 을지로에 갔다. 환승역에서는 나답지 않게 길을 조금 헤맸는데, 평온한 평일 오후 전철역에서 홀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나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계단을 다시 내려가고, 왔던 길을 돌아가도 하나도 싫지 않았다.
도착한 을지로 3가에서 지도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가니 허름한 건물이 나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를 발견했다. 처음 만난 그 사람은 내 곁에 오래 있을 사람 같았다.
작은 잔에 커피를 내려주는 그의 손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기타를 치는 손이었고, 선한 사람의 손이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약속했던 대로 청계천 일대를 걸었다. 흐르는 물과 함께 흘러가며 그가 내게 해 준 말들은 꼭 내가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내 속에서 나온 생각 같았고, 내 삶 같았으며 내 마음 같았다. 우리는 걷는 속도가 비슷했고, 대화를 하다가 서로를 바라보는 타이밍도 비슷했다. 말을 꺼내기 전 시간이 필요한 점도 비슷했고, 그 때문에 대화 사이사이 긴 정적이 이어지기도 했으나 그것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불안하거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았다. 그렇다는 사실이 내게는 기적 같아서 우리가 영영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냉면집에서 나는 끝내 울고야 말았는데, 그런 내가 이해받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깊이 안도했기 때문이다. 어긋나지 않고 합쳐지는 사랑의 감정을 그날 처음 느꼈다. 맑은 하늘이 내게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좋은 날씨 안에 머물던 사랑이 망설이지도 않고 내게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우리가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마른 꽃송이를 붙인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 아름다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월의 당신에게
열여덟 살이었던 슈만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이 시를 읽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꽃봉오리 피어날 때
나의 마음 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었네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새들이 노래할 때
그대에게 고백했네
나의 그리움과 갈망을
오월의 우리에게 핀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건 욕심일지 모르지만, 어떤 욕심은 이렇게 당연한 듯 무심히 찾아오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욕심을 한 번 부려보고 싶다. 너무 많이 돌아오느라 늦게 도착한 나를 그토록 따뜻하게 맞이해준 나의 사람, 당신에게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을 길이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