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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Jan 16. 2024

갈치 10킬로는 사랑을 싣고

그 남자의 요리생활

직장생활 22년 만에 내 방이 생긴 사람이 되었다. 신입사원 연수 시절에 동기들과 평생직장 없을 거라며 이 회사 10년 다니겠냐 했는데 그 두 배에서 2년을  더 얹고도 용케 버티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소위 라떼 부장이 되었는데 조직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후배들이 뭐라 하든 간에 단위 조직의 장이 되는 건 영예로운 일이다. 공채로 입사한 회사원으로서는 그만한 일도 없다. 흔히 말하는 베네핏도 있다. 팀장, 팀원들의 인사평가권이 있고 별도의 공간이 주어지며 업무용 차도 한 대 나온다. 물론 공짜는 없다. 회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매일매일 실적에 쫓겨야 하고 막상 되어 보니 직원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해주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리더십이라는 건 저절로 길러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도 않아서 요즘은 자려고 누우면 그 고민에 뒤척일 때가 많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지. 영향력을 갖고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지방 말단 공무원, 소위 시골 면서기였던 아버지는 40년 가까운 세월을 공직에 있었으면서도 장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노력을 안 했겠냐만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아버지가 가진 마지막 직함은 6급 지방행정 주사 부면장이었다. 중도 탈락을 하지 않고-꽤 많은 공무원들이 정년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정년퇴직을 무사히 한 것만도 다행이라며 면사무소 2층에 열렸던 퇴임식이 끝난 뒤 가족들은 덕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당사자보다 면장이 되지 못한 것을 더 안타까워 한 사람은 아마 어머니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는 어머니의 자존심이기도 했을 테니까. 그런 아버지는 퇴임하고 몇 년 되지 않아 불의의 몹쓸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당신이 면장이 아니면 어때, 건강하게 곁에만 있어주기만을 바랐을 어머니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헛헛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큰 아들인 내가 사회적 성취나 자리에 욕심이 크지 않다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다. 너는 좋은 학교도 나왔고 능력도 있는 것 같은데 왜 너의 자리(내 자리는 어디였을까?)를 찾아가려고 하지 않느냐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 싫은 건 안 하는 고집 센 아들은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회사에 다니는 걸로 효도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내가 덜컥 부장이 되었고 더 큰 일(이 뭘까 싶다만)을 했으면 싶었겠지만 그래 그것도 장하다 싶었던 어머니는 나의 전화를 받고 우시지는 않으셨고(그건 너무 신파니까) 장하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말을 따로 꺼내지 않았는데 아마 그 얘기를 했더라면 서로 괜히 울컥해질까 봐 그랬을 것이다.  세상의 여러 일들 가운데는 말을 해도 모르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플래카드 걸 일(제 아무리 시골이라도 장관 취임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까지는 아니어서 어머니는 아들이 부장 된 기쁨을 수시로 모이는 동네 고스톱 멤버 아지매들에게 떡을 돌리는 것으로 자축했다. 떡을 돌리는 어깨에 힘깨나 들어갔을 테고. 아들에게는 양복을 한 벌 해줄까(그건 좀 비싸기도 하고), 꽃다발을 보내줄까(화분 많이 받을 것이고) 하다가 수산유통업을 하는 옆집 형님에게 갈치 한 박스를 주문하기로 했다. 어차피 쓸 돈, 이웃집 매출도 올려주고 주윗분들에게 한 번 더 상기하는 효과가 있을 테니까. 


하얀 스티로폼 박스를 가득 채운 갈치가 그리하여 우리 아파트 경비실로 배달되었다.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비실을 찾았다. 맙소사. 갈치 무게가 자그마치 10킬로그램이었다. 공교롭게 우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교체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공사는 아직 일주일 넘게 남았고 결정적으로 우리 집은 8층도 아니고 18층! 아마도 어머니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아들네 집이 18층이고 엘리베이터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10킬로그램짜리 갈치를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보냈을 리 없다. 한 달 내내 무게가 나가는 택배 물품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18층까지 들고 올라가는 동안 두 어 번 쉬며 숨을 돌려야 했지만 냉동실 한가득 손질된 갈치를 채워놓고 보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나는 식재료를 사랑하니까.


아끼지 말고 마음껏 구워 먹고 지져먹고 쪄먹고 조려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먼저 조림을 했다. 토막 낸 무를 바닥에 깔고 양파, 대파도 썰어서 더한다. 다진 마늘은 듬뿍. 간장, 설탕, 고춧가루, 후춧가루로 양념장을 만들어 사이사이에 끼얹었다. 물은 조금 자작하게 붓고 두툼하고 실한 갈치 몇 토막을 올린 다음 중약불에서 자박자박하게 끓여내면 칼칼한 갈치조림이 완성되었다. 요리하는 아들의 승진 선물을 갈치로 하는 멋진 어머니와 한 접시 같이 하고 싶어 사진을 정성스레 잘 찍어서 보내 드렸다. 설날에 내려가서는 아버지 얘기도 하고 맛있는 갈치 요리도 해드려야지.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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