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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도민 Nov 17. 2023

우리의 플레이리스트

혼자 운전할 때 주로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선택의 고민을 없앤” 리스트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다 때려 넣은 것으로, 메탈, 힙합, EDM, 록, 재즈, 가요 등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가 없을 때 듣는 용으로, 온갖 욕설이 난무하다 사랑 노래가 나오고, 조용조용한 재즈가 나오다 좌우지장지지하는 기타 리프가 나오는, 연계성 제로의 26시간짜리 괴랄한 플레이리스트다.

한 번은 내 차에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다 실용음악 키보드로 전향한,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잔잔한 친구가 함께 탄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내 차에 타고 흠칫했던 것도 같은데, 아마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김동률 음악이 끝나고, 메가데스가 나오는 타이밍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참고로 클래식 음악은 없다. 이유는, 일단 그 플레이리스트는 운전용이다. 운전할 때 듣는 음악은 BGM으로써의 기능이 강해야 하는데, 나에게 클래식 음악은 감상용이다. 그리고 보통 운전하면 자동차 소리부터, 경적, 옆 차 소리, 여의도에서 들리는 확성기 소리 등등 별별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 클래식 음악은 웬만한 볼륨이 아니면 그런 주변 소리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운전 중에 클래식 음악은 잘 안 듣는다.

     

나의 음악 취향은 “내가 듣기 좋은 것”이다.

록과 메탈을 가장 좋아하지만, 대학 이후로 클래식도 많이 듣고, 힙합, K-POP, 제3세계 음악도 듣는다. 국악도 가끔이지만 당길 때가 있다. 


이렇게 잡다하게 듣게 된 것엔 역시나 어렸을 적 환경 덕이 크다.

집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주로 틀어놨었지만, 그 외에 다른 장르의 음악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집에 있던 Queen의 <Flash> LP나 Pink Floyd의 <The Wall> 테이프는 마르고 닳도록 들었었고, 누나 방에서 몰래 빼 와서 들었던 Nirvana의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는 신세계를 열어줬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누난 원래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국악을 전공해서 가지고 있는 음반 대부분이 예프게니 키신이나 사라장(aka 장영주), 혹은 거문고와 대금 산조였다. 그러니 저 사이에 꽂혀있던 너바나가 어린 나의 눈에 띌 만도 했다. 나중에 누나한테 도대체 너바나를 왜 샀냐고 물어보니 “하도 다들 좋다고 하니까 한번 들어볼 생각으로 샀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 집에서 분명히 듣지 않았던 음악이 있다. 가요였다. 정확히는 립싱크하는 댄스가수의 음악. 우리 집에서는 그건 음악이 아니었고, 그걸 립싱크하는 사람도 가수가 아니었다. “가수면 노래를 불러야지”가 당연한 무드였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외에, 트로트를 포함한 옛날 가요 역시 우리 집 그 누구도 듣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가요톱텐 같은 방송은 보지 않았으며, 열린 음악회나 전국노래자랑 역시 우리 집에선 봤던 기억이 거의 없었고, KBS 1FM 이외 라디오는 듣지 않았다. 특히 전국노래자랑이 방영되는 일요일 정오는 교회에 있을 시간이라 본방 사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덕분에 지금도 와이프랑 이야기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어떻게 음악 전공했다는 사람이 그 가수를 몰라?”다. 나에게 한국 대중음악은 어렸을 적 빠져 살았던 서태지와 신해철의 음악, 한대수 선생님의 공연을 보고 꽂혀서 찾아들었던 포크 음악, 산울림과 신중현 선생님과 같은 올드록과 인디밴드, 언더그라운드 힙합 정도다.(신해철 고스트스테이션은 놓치지 않고 들었다!)

저렇게 적어 놓으면 상당히 많은 것 같지만, 다른 장르나 국가의 음악에 비하면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비중은 매우 작다.


와이프는 나와는 정 반대까진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가족 모두 예술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계시고, 어렸을 적 클래식 음악회를 봤던 경험은 거의 없다. 다만 집안 어른들께서 ‘사람은 많이 보고 느껴야 한다’라고 생각하셨던 건 분명하다. 클래식 음악은 아니어도, 어렸을 적 미술관이나 체험 학습에 관한 경험치는 나보다 와이프가 더 높다.

음악에 있어서 와이프는 직접 취향을 찾아갔던 경우다. 텔레비전으로 접한 뮤지컬이 너무 좋아 연극과 뮤지컬 덕후의 길을 걷다 그걸 업으로 삼았었으며, 뮤지컬 업계를 떠난 지금도 공연에 한 발 걸친 정도의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음악 취향은 가벼운 록과 팝, 가요, 그리고 뮤지컬 넘버를 좋아한다. 집에서 딱히 “이걸 들어라 저걸 들어라”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우리 집처럼 가요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집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와이프를 만나고 뮤지컬을 좋아하게 됐다. 그전에 뮤지컬은 내 관심 밖이었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A.L.Weber의 작품처럼 너무나도 유명한 거 외에는 전혀 몰랐는데, 와이프랑 연애 시절부터 함께 이런저런, 크고 작은 뮤지컬을 열심히 보러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좋아하게 됐다.

내 휴대전화에는 와이프를 위한 플레이리스트도 있다. 뮤지컬 넘버 중 나와 와이프가 좋아하는 작품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리스트는 아이랑 있을 때도 듣긴 하지만, Avenue Q 같은 게 나오면 당연히 넘긴다) 요즘에는 내가 만든 것보다 새로운 노래가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는 애플에서 큐레이션 하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을 때가 많다. 아무래도 나와 와이프가 모르는 새로운 곡을 듣기에는 이편이 더 쉬우니까.


우리의 부모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경험치를 쌓도록 해줬다. (음악 한정으로) 나의 부모님은 본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그것을 접할 수많은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나는 그 환경 속에서 나만의 취향을 찾아갈 수 있었다.

처가 어른들께선 문화 전반에 있어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와이프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본인이 알아서 취향을 찾아 나섰고, 그것으로 본인의 밥벌이까지 해결하게 됐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당장 먹고살기 바쁜데 뭘 굳이 시간 들여서 그런 걸 듣고 보고 하냐고 하지만, 문화적 경험치와 이에서 시작되는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아이의 인생에 분명 긍정적 요인이 된다.(내가 이 분야에 있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관련 연구는 수두룩 빽빽이다) 


부모가 꼭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어 아이에게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해 줄 필요는 없다. 그저 다양한 경험을 쌓을 환경을 만들어주고, 취향을 찾아가는 버릇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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