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lia Kim Jun 25. 2024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이 일을 절대 하지 말라고 외친다

패션브랜드 런칭기




장장 4개월을 준비했던 브랜드의 SS 상품이 오늘 오전의 전화통화를 마지막으로 대부분 드랍되었다.  

이유인즉슨 지체된 수량과 단가 협의, 거래처 미스커뮤니케이션 등의 이유로 인한 생산 리드타임의 조율 불가로 인한 협의 하 드랍.

패션은 사계절에 시즌의 특성을 타기 때문에 적기에 제품이 나오지 않는 다면 무척 리스크가 크다. 여름을 타깃으로 만든 제품인데 여름이 다 지나서 출시하게 되면 그만큼 판기가 줄어드는 것이고, 판기가 줄어든 채 재고가 소진되지 않는다면 남는 재고는 영영 창고행 신세니까 말이다.

엎친데 덮친 격, 물류로 이동하던 SS 재고 일부를 택배사에서 분실했다. 일주일째 행방불명 상태.




퇴사 후 여러 강의들과 브랜드 기획을 병행하면서 1인 프리랜서 & 사업가로서의 눈부신 도약을 꿈꾸었다.  

퇴사 전 맺었던 다양한 인연으로 좋은 거래처와 유통처들을 선점한 메리트를 안고 ‘이만하면 충분히 좋은 시작이지’ 당차게 출범했다. 내가 11년이나 이 업과 신사업에 몸 담았는데 까짓 거. 성공과 결과물이라는 것은 시작하는 자의 몫임이 분명했기에 용감히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었던 좋은 거래처는 말로는 명쾌한 답을 해주시는 것 같았어도 늘 기록과 정리가 되지 않아 구멍이 나기 일쑤였고 스무스하게 진행될 것 같았던 좋은 기회나 경로들도 말 뿐인 빛 좋은 개살구가 많았다.


아 누가 그래서 그랬던가. 공짜는 없다고…


대기업에서의 나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소규모 브랜드 대표인 나에 대한 대접 차이는 천지 차이라는 것쯤은 정도는 예상했고 그에 따른 대비도 했지만 그보다 더 나를 초라하게 만든 건 어느 정도 능숙하고 전문적일 줄 알았던 나의 프로젝트 관리 능력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실책감이었다. 몇달 전 재미로 친구가 봐준 점괘가 생각난다. 잘 모르는 분야에 도전한다면 큰 코 다친다는 점괘. 그 것 정말로 용하다 친구야..




누구보다 기획 프로세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난데. 누구보다 일정 관리가 중요한 줄 아는 나였는데. 판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제품을 내놓기보다 일부 타협하거나 포기할 줄도 아는 난데. 말보다는 서류의 공신력을 아는 사람인데.

이 모든 공식을 새까맣게 잊은 듯한 내가 한심하여 자책감이 몰려왔다.




알지 않나. 나 같은 J 성향들은 애초에 애자일한 프로젝트 관리법 따위가 익숙지 않은 종족이라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대수롭지 않게 다음 스프린트를 준비하는 것이 남들보다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은, 특히 다른 날보다 더 맥이 빠진다. 눈물이라도 나서 광광 울 수 있다면 좀 시원해질 텐데. 내일은 공교롭게 신사업 기획과 관련된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약해지면 안 돼. 억지로라도 책상 앞에 앉는다.


일정관리에 진심인 나



오전 내내 거래처 대표님의 통화를 받고 모든 것을 내려놓기를 의사결정한 후 (SS 품목을 드랍한다는 뜻입니다. 오해 금지) 한 동안 멍을 때리다가 이따금 생각나는 옛 사수의 충격적인 피드백을 떠올렸다.



“줄리아는 은근히 멘털이 센 거 같아요”



이 평가를 받은 당시는 내가 번아웃과 공황장애로 한창 병원을 다닐 때였으니 충격적일 만도.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멘털이 바사삭 인 시즌인데… 어딜 봐서, 어째서?



아마도 그건 회사를 다니면서 나의 신조가 ‘불평불만하지 않는다” 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규브랜드를 런칭하면서, 여러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의도치 않게 신사업 기획자가 되면서 울어봤자, 한탄해 봤자, 불평불만 해봤자 당장 달라질 것은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공들인 프로젝트가 무산되거나 제로베이스가 되면 위로하듯 나를 다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불평하면 뭐 해. 빨리 다음 거 해서 결과를 내야지.



아 그럴 수도 있징.


위기의 순간에 내가 즐겨 찾는 마법 같은 문장이다. 다른 어떤 멋들어진 조언이나 이야기도 이 문장보다 효과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실로 그러하다. 오늘 포기하고만 싶었던 삶도 일으켜 세워주었으니 나에게는 생명의 은인 같은 일등공신 문장이다.




패션 MD, PB와 신사업 관련한 강의를 하다 보면 이들 직무에 가장 필요한 역량들을 짚어주며 설명해 주는 시간이 있다. 직무적으로야 기획력 분석력 문제해결능력 등 여러 가지 필수적인 역량을 언급하지만 사실은 MD 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모든 순간에는 위기가 있지 않나. 그 순간에는 기획력이고 분석력이고 나발이고 당분간은 유머가 가장 필요하다.




우리 너와 나의 긴장감과 긴박함은 잠시 내려놓자고요. 여유와 유머와 해학을 즐깁시다.
다들 아시다시피 인생이 빡세잖아요.




정말로 힘들었다 오늘. 그런데 또 한 번 느낀 것은 인생의 위기에는 때로는 반대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리적인 해법이나 진중함 자중함보다는... 웃기고 해학적인 일을 하면서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애초에 알맹이가 없는 것 따위를 내뱉는 것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고의 전환을 통해 인생의 위기탈출 넘버원의 매뉴얼을 다질 수도 있다.



자책과 실망 -> 셀프리뷰 -> 유머와 해학  -> 그리고 재출발



그나마 위안이 되는 나의 강점은, 못다 한 것에 한 없이 미련 떨 여유가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그나마 손해를 줄이는 방법임을 인지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쥐어짜던 머리를 머쓱하게 정돈하고 나선 오후에는 새로운 거래처를 만나 FW 진행 로드맵을 짰고 결과적으로 이번주까지는 FW 작지를 작성해서 새로운 거래처에 넘겨주어야 하는 바쁘기 그지없는 급박한 일정을 만들어왔다. 나란 인간.. 나 자신을 못살게 구는 재주가 있어. 그치만 언젠간 유용할거야.




다시 시작이다. 몹쓸 사이클.

위기탈출 넘버투. 이번엔 잘 작동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 후 강사로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