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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쓰니 Oct 31. 2021

자취하면 어른이 되나요? ①

그토록 꿈꿔오던 자취 생활이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라는 걸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한 학기만에 기숙사에 떨어졌다. 성적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탓이었다. 하지만 추가 모집에 지원하지는 않았다. 자취가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추가로 신청하면 대기 번호를 주는데, 언제 연락 올지는 모른대. 학기 시작되기 직전이나 학기 중에 연락 오면 그때 가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하는지. 과 선배로부터 대기번호 끝자리 학생한테까지도 대체로 연락이 간다는 정보를 얻었음에도 그랬다. 별것도 없는 기숙사 짐, 일단 미리 싸놓고 최후의 최후까지 기다리면 됐을 텐데. 만약 학기 시작할 때까지도 소식이 없다면 근처 고시원에서 임시로 지내다 옮겨가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그랬다.


    강원도의 끝자락에 살던 우리 가족. 나는 첫째였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도 서울에서 방을 구하는 것도 처음이었던 우리 부모님은 나만큼이나 서툴렀다.

    그 까닭에 자취방 후보를 알아보는 일은 단 3개월이라도 서울 생활을 해본 나의 몫. 하지만 나라고 나머지 가족들과 크게 다를 게 있었겠나. 그저 알음알음 얻은 정보로 재학생 커뮤니티에 올라온 홍보글에 쪽지를 보내고, 지도 앱에서 검색되는 중개사무소에 연락을 돌릴 뿐이었다.


    정해진 예산은 최소 범위, 부모님 일정상 가능한 날은 일요일 하루.

    서울은 집도 많고 주말에 영업하는 중개사무소도 많다기에 문제가 없을 거라 기대했건만. 시세에 비해 빠듯한 예산으로 매물을 구하는 고객은 휴일까지 투자할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듯, 전화한 부동산마다 마땅한 방도 별로 없고 일요일은 어렵겠다며 퇴짜를 놓았다. 조바심을 내며 재학생 커뮤니티에 올라와있는 모든 방에 연락을 돌렸지만 집주인이 직접 내놓은 방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결국 우리 가족은 약속이 잡힌 단 한 곳을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하게 되었다. 다시 서울을 왕복할 여유는 없었기에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입주일이나 방세 같은 조건을 최대한 맞춰주겠다는 주인아주머니의 친절함에 안심을 했던 것 같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짜리 방. 복층 형태에 학교 쪽문 바로 근처, 게다가 주인 내외가 같이 살고 있어 안전하기까지 하다는 소개글을 읽고 또 읽었다.

    월세가 꽤 비싸긴 하지만 서울은 다 이렇다고 하니까. 학교 근처에서 방을 구하려면 보증금 500만 원도 쉽지 않다던 동기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니 괜찮은 조건을 잘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들떠서 얘기하는 나와 달리 엄마, 아빠의 표정은 뜨뜻미지근. 그날 밤, 300만 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냐는 대화 소리가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며칠 뒤에는 나도 그 자리에 불려 갔다.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안 좋은 느낌. 한참의 침묵 끝에 아빠가 입을 뗐다.


    요즘 집 사정이 좋지 않아서 당장 현금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실은 1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도 무리해서 준비했던 거라고. 그래서 자취방 보증금을 채울 여건이 되지 않으며, 2학기부턴 학자금 대출이든 생활비 대출이든 모두 받아야 할 것 같단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빚은 생기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며 무어라 덧붙이는 아빠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이걸 이제야 말해 주지? 지금 와서 이러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원망스런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럼 그 집을 보러 갈 수 없게 되는 건지, 아니면 아예 휴학 신청을 해야 하는 건지. 갑자기 감당하기 버거운 짐이 쥐어진 것 같은 상황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1학기를 마치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때라도 말해줬으면 돈을 더 모았을 텐데. 학기 중부터 알바 자리를 찾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대학에 합격했을 때, 원서를 넣을 때부터 우리 집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해줬으면 서울로 가겠단 욕심 버리고 지방 국립대로 갔을 텐데…


    뒤늦게 사실을 알려준 엄마, 아빠 때문에 불효녀가 된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엄밀히는 자취 로망을 이뤄보겠다며 철없이 거짓말을 했던 것, 집안 사정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 없던 것 전부가 나의 선택이었어서. 엄마, 아빠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이기적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게 화가 났다.


    더 이상 10대가 아니기에 마냥 아이처럼 굴 수 없다는 걸 왜 몰랐을까. 스물이 되어 어른의 보호나 통제 없이도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는 건, 반대로 내가 가는 곳과 행하는 것이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 때로는 날 앞서 걷던 어른, 내 몫을 대신 채워주던 부모님의 무게를 나눠 갖게 된다는 뜻임을.


    독립의 의미가 자유보단 책임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 날.

    나는 그토록 꿈꿔오던 자취 생활이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른의 경계에서 억지로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TMI 한 스푼

아직도 우리 가족은 모르는 일인데, 사실 1학기 중반부터 학교 후문 바로 옆에 있는 한솥 도시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학기엔 집에서 용돈을 보내줬는데도 불구하고 가고픈 곳도 사고픈 것도 많아 몰래 시작한 일이었다. 종강까지    정도를 알차게 벌고 남김없이 썼더랬지.  비밀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자신에게  화가 났던 걸지도 모르겠다.


커버 이미지 출처: flat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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