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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Nov 11. 2022

늑대가 나타났다

거짓말쟁이들의 마을 - 3

 

눈을 뜨니 숲이었다.

 

사방은 짙푸른 나무들로 가득했다. 작은 새들이 이따금씩 날아올랐다. 숲은 고요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둘 달려있었다. 문득 다리가 달려 있다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두 나무 사이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생각과 고민에 몰두하고 싶었다.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숨이 차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걸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오래도록 고민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경우 길은 두 갈래다. 어떤 실마리가 나타날 때까지 숲을 헤집고 다니거나, 제자리에 앉아 누군가가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거나.


유랑은 분명 지치는 일이지만 넋 놓고 구원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무턱대고 어딘가로 쉼 없이 나아갈 수도 없었던 까닭에 결국 원칙 하나를 세웠다. 몸을 기대어 쉴 만한 크기의 바위가 나타나면 주저 없이 주저앉아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막상 이를 실천해보니 적당한 바위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몸을 누일 바위를 고르는 스스로의 안목이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혹은 두터운 초목에 가려 있는 바위들을 수없이 지나쳐버린 까닭이었다.


처음으로 쉴 만한 장소를 찾아낸 것은 어느 개울가 근처였다. 긴 행군에 지쳐 단단한 고목 뿌리에 아무렇게나 몸을 기대어 잠을 청하려는데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쪽에 달린 귀는 잘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개울 건너편에는 편평하게 잘 다듬어진 바위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훗날 숲에서 길을 잃게 되면 다시 찾아오고 싶을 여인숙처럼 보였다.




이튿날도 해질녘까지 숲 속을 누볐다. 능선으로 향하는 중턱에 잠시 머무르며 붉은 석양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몸을 누일 다음 바위를 찾아내야 할 시간이었다. 반대편 산등성이 부근을 둘러보던 중 안성맞춤인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는 수사슴처럼 보이는 어렴풋한 형체가 서쪽을 물들이는 석양을 응시하는 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 흥미가 생겨 그림자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바위에 당도할 무렵 주위는 이미 칠흑처럼 짙었다. 검은 사슴 형상도 한참 전에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그는 어떤 사연으로 미동도 않은 채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불현듯 어릴 적 들었던 한쪽 뿔 없는 수사슴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뿔이 어떤 연유로 부러졌는지에 관해서는 많은 설이 있었다. 쫓아오던 누군가를 뿌리치기 위해 질주하다가 단단한 참나무 가지에 걸려 오른쪽 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서서 졸다가 벼랑 아래로 쓰러져서 벌어진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실은 누군가를 찾아 헤매던 도중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다친 것인지도 모른다. 확인할 바 없는 모든 이야기들은 그저 낭설로 남았다.


검은 수사슴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에게 오른쪽 뿔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도,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늘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수리 우편에서 무게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은 탓에 항상 기우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검은 수사슴은 잃어버린 오른 뿔이 아쉬웠을까.

어쩌면 한쪽 뿔의 상실을 통해 한결 가벼워진 머리를 만끽하며,

내심 왼편 뿔의 부재마저 꿈꾸지는 않았을까.




분명 숲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채로 눈을 떴지만 숲에서 누구와의 교류도 없이 스스로 성장했을 리는 없다. 가장 큰 두 가지 근거는 언어를 바탕으로 사고한다는 점과 두 발로 서서 걷는다는 점이다. 이는 유년 시절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나 양팔로 세상을 휘젓는 방법을 배웠다는 증거이자 다른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언어를 습득한 적이 있다는 증거다. 다만, 나는 왜 숲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버린 것일까.


어쩌면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어쩌면 이 여정을 통해 만나야 할 누군가가 있어서.


그 어떤 것이 정답이어도 좋았다. 다만 그 여부를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것 뿐이다. 이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필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알 수 없음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무겁게 발목을 잡아끌기 전에 다시 어딘가로 움직이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주쳤다. 언제부터 근처에 와 있었는지 모를 그 녀석과 말이다.  


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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