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어 아홉 번째 여름을 맞았다. 첫째 아이 개학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방학이 먼저 끝난 둘째와 안방에서 놀고 있다. 더워 죽겠는데 잉잉거리며 자꾸 내 곁으로 붙는다. 오랜만에 유치원에 가서 그런지 부쩍 피곤해 보인다. 기지개도 켜고 오랜만에 쭉쭉이로 몸을 풀어주었다. 누워서 끝말잇기를 하면서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첫째가 올 시간이 지났다. 종일 집에 있다가 이제 좀이 쑤신다며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는 아이. 분명 15분만 타고 온다고 했는데(대부분 시간에 상관없이 실컷 놀다 오지만.),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아파트 단지 안에서만 타기로 했는데 약속을 잊은 건지 슬슬 신경이 쓰인다.
"띠-띠띠-띠. 띠띠- 띠- 띠. 띠. 덜컹"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돌아왔나 보다. 겨울씨와 난 조용히 숨어있기로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다음 겨울씨는 커튼 뒤로 숨었고, 나는 여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엄! 마! 나 왔어요!"
평소와 같으면 힘차게 나를 부르며 들어왔을 첫째가 어인 일인지 조용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 느낌이 들고 이내 거실장 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난다.
"아들! 왔어? 인사도 안 하고 뭐해?"
"아... 그게 엄마. 나 넘어져서... 흐윽. 많이 다쳤어... 으앙~~~"
아이는 다가와 팔을 내밀며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내 손 위로 뚝뚝 떨어진다. 세상에. 깜짝 놀라 상처를 들여다보았더니 팔꿈치 언저리가 깊게 파였다. 그리고 피가 많이 난다.
"아고 많이 다쳤네. 엄마한테 먼저 말해야지~ 왜 혼자 그러고 있어?"
"아 엄마, 나는 소독하기 싫어! 그건 정말 아파서... 소독약 쓰기 싫다고~~"
약속을 어기고 산책로까지 다녀와서 혼날까봐, 소독약이 닿는 따갑고 아픈 느낌이 싫어서, 단지 그 이유로 가을씨는 스스로 밴드를 찾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가려 했다. 다른 곳은 괜찮은지 살펴보는데 왼쪽 바지 무릎에 커다란 구멍이 보인다. 흙먼지가 가득 묻은 바지를 벗겨 보니 세상에. 팔꿈치보다 무릎에 난 상처가 더 크다. 피범벅 가운데 상처 자국은 한 3센티는 넘어 보인다. 챙겨 입은 옷이 긴 체육복이어서 다행인걸까.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 반. 어떡하지. 소독 먼저 하고 병원에 가야 하나. 둘째는 어쩌지. 만화 틀어주고 얼른 다녀올까. 얼마나 걸릴까. 금방 처치가 될까.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상황을 정리하려 애쓰지만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이슈가 동시에 떠오른다. 정신을 가다듬고 정형외과에 전화를 걸었다. 팔꿈치는 패였고 다리는 3센티 정도 찢어진 것 같다니 대기 손님이 없다며 얼른 오란다.
일단 겨울씨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보고 싶은 만화를 찾아 얼른 틀어주며 나갈 준비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모르니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바로 퇴근이 가능하다 한다. 퇴근길이라 막히겠지만 그래도 한 시간 안에는 올 수 있겠지. 혹시 쓰일 데가 있을 것 같아 물병과 손수건을 찾아 재빨리 가방에 구겨 넣는다. 걸을 수는 있을까. 아이는 눈물을 닦고 괜찮다며 운동화를 찾아 신는다.
이제 가자. 병원으로. 나가려는데 맙소사, 비가 쏟아진다. 소나기처럼 퍼붓는다. 하아. 병원 갈 때까지만이라도 봐주면 안되겠니, 금방 멈출 것 같지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기왕 집 밖으로 나온 아이와 나는 우산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비를 통째로 맞으며 병원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평소에는 15분, 빨리 걸으면 10~12분 정도의 거리. 차로 간다면 조금 더 나을까. 택시라도 불렀어야 했나,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도 할 걸 그랬나, 아니다. 택시가 올 거리도 아닐뿐더러 퇴근시간이라 차들도 기어가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내내 비가 왔다. 운동화와 반바지가 흥건하게 젖고 아이 다리에 묻어있던 핏자국도 다 지워져 상처가 선연히 드러난다.
아이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한 번씩 손을 잡았다 놓았다, 삐뚤어진 우산이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방향을 고쳐주고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저린다. 머릿속에는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불안감과 함께. 많이 찢어진 거면 어떡하지. 일단 침착하자. 3분만 더 가면 돼.
"엄마! 그런데 왜 가슴이 찢어져?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엄마에게 물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잘 넘어졌던 나는 무릎에 상처가 없는 날이 드물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다리는 짧은데 몸은 빨리 가려는 조금 우스꽝스런 모습이라 한다. 걷다가도 자주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넘어졌고 양무릎에 찢어진 상처가 자꾸만 덧나서 낫지 않는 상태였다.
엄마는 읍내 병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버스를 타고 삼사십 분 정도 나가야 한다. 시골이라서 어지간하면 집에서 처지하곤 하던 때에 병원까지 다녀왔다니 상처가 심하긴 심했나 보다. 그때가 몇 살이었을까, 아마도 여덟 살 아니면 아홉 살. 지금 첫째 아이와 비슷한 나이었을게다.
진료를 받고 병원 침상에 누웠다. 무릎에 상처를 소독하는데 소독약이 닿는 자리에 하얀 기포가 부글거리며 화산처럼 올라오는 느낌이 난다. 쓰리고 따끔했고, 어쩌면 많이도 찡그렸지만 아프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때 엄마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아유 어째, 가슴이 찢어진다"라고 했다. 은유임을 알 리 없는 나는 해맑은 표정으로 집으로 오는 내내 묻고 또 물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을 나의 아이는 기어이 소환해냈다. 아이들을 키우며, 아니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럴 때면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돌보는 느낌이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 충족되지 않았던 돌봄과 다정함을 이제라도 채우고 싶은걸까. 너무 늦지는 않았나 되물었지만 지금이 가장 빠른 때임을 안다. 무수한 상처를 받았지만 빛나는 사랑 또한 받았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진료 내내 비가 왔다. 아이의 상처는 다행히 꿰매지않아도 된다고 한다. 팔꿈치는 파여서 아무는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고 무릎은 날마다 소독하고 메디폼 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항생제도 잘 챙겨 먹이고 흉 지지 않게 주의하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땀 흘리거나 물 닿으면 안 돼요. 그럼 상처 덧나고 안 아물어요."
계산하고 처방전을 받는데 간호사가 잊을세라 친절하게 한 번 더 일러준다.
"오예! 안 씻어도 된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를 어찌할꼬. 피식 웃음이 나온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이 조금 환해졌다. 처음 알게 된 소독약도 샀다. 하얀 거품도 올라오지 않고 따갑고 아프지도 않은 고급 소독약. 뽀로로의 든든한 친구 포비를 닮은 이름의 적갈색액체가 묻은 커다란 면봉을 보며 아이는 또 한번 안도한다.
"비가 그쳐서 다행이야 엄마. 병원에 올 때 비가 오지않았으면 가는 길에 비가 왔을지도 모르잖아."
그래 정말 그렇네. 다행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맑게 개었다. 가로수에서 자꾸만 떨어지는 빗방울이 비가 그친 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나도 엄마도 어렸던 그 날, 엄마는 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가슴이 찢어진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동동거리는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내 손을 이끌었던 그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랜만에 몸으로 절절히 깨닫는순간이다.
작은 사람들이 있다. 한없이 빛나는 맑은 아이의 모습으로, 때론 노인이나 철학자 같은 말을 하는 작은 이들이 내 곁에 둘이나 있다. 그래서 좋다 아직은. 덕분에 나는 날마다 내 안의 작은아이와 나를 둘러싼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