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5월 11일, 넝마주이 다룬 '파리의 시포니아' 공연
1847년 5월 11일 프랑스 파리 포르트생마르탱 극장에서 95분짜리 연극이 공연됐다. 제목은 '파리의 시포니에(Le chiffonnier de Paris)’,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인이자 극작가인 펠릭스 파이이트가 극본을 쓴 이 영화는 파리에서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는 한 남자가 은행가를 살해하고 신분 세탁을 한 후 살인자와 희생자의 딸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당시 하층민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잘 보여줘 큰 호평을 받았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시포니에'라는 직군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직군은 다양한 표현으로 불렸다. 미국에서는 '래그 피커(rag picker)' 또는 '래그맨(rag man), 영국에서는 '본 앤 래그맨(bone and rag man)'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20~30대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50대 이상에게는 익숙한 단어, '넝마주이'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넝마주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80년대 전후로 알려지지만 그리 널리 퍼진 것 같지는 않다. 넝마를 주으려면 일단 버려지는 물건이 많아야 했지만 당시에는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귀족과 같은 부유층은 어떤 것도 가질 수 있고 아무것이나 살 수 있었지만 서민들은 달랐다. 유럽 도시에서 사는 인구 중 절반 이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먹고 자고 쓰는 것, 모두가 부족했다. 살기 위해서는 거리건 하천이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쓸 만한 것을 모아야 했지만 버려지는 것이 없으니 주을 것도 없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에게 판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꿀 일이었다.
산업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꿨다. 급속한 생산성 증가는 풍요의 시대를 만들었다. 기계의 힘을 빌린 공장들은 상품들을 찍어내기 바빴고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상품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귀족만이 아니라 평민들도 소비의 대열에 동참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그에 필요한 원자재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했는데 이것이 만만치 않았다. 국내에서 공급이 안된다면 해외에서라도 들여와야 했지만 이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자기 나라에서도 겨우 수급을 맞추는데 다른 나라로 팔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됐을까. 결국 해답은 재활용이었다. 종이 공장에서는 헌 종이나 헌 옷가지 등이 계속 조달돼야 했고 유리 공장에서는 깨진 유리조각들을 모아 녹인 후 다시 병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 순환 체계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길거리에서 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모아야 했다. 넝마주이가 본격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쓰레기의 재활용 사이클은 이렇게 완성됐다. 이제 넝마주이는 거리의 부랑아가 아닌 '산업 역군'이 됐다.
생산과 소비가 증가했다고 모두가 풍족한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력을 상실한 채 도시의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쓰레기는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해결책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은 스스로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판다는 점이었다. 이제 빈민층에게 길거리에 널려진 것들은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닌 '원자재'였다. 누더기나 각종 잡동사니들은 생활비를 버는 유일한 자금원이었다. 이들에게 쓰레기 수거는 지금처럼 환경 보전과 같은 거창한 이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였다. 독일의 역사가 로만 쾨스터의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결국 모든 것은 돈이었다. 사람들은 애쓰고, 얻어내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부족함 속에서 고통받으며 더 많은 것을 꿈꿨다." 넝마주이는 필요하지 않거나(unnecessary) 원하지 않는(unwant) 것을 모으는 'waster'가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모으는 'picker'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넝마주이들은 닥치는 대로 모았다. 헝겊, 깨진 항아리나 유리, 종이, 코르크 마개 등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뼈와 손톱, 머리카락 심지어 거리에 나뒹구는 개와 고양이 시체까지 수집했다. 가장 많이 모은 것은 헝겊이었다. 종이를 대규모로 만드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종이 사용은 부쩍 늘었다. 당시 종이는 펄프가 아닌 천조각으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나 영국 등 주요 국가에서는 여전히 종이가 부족했다. 헝겊은 부족한 종이를 만드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뿐만 아니다. 깨진 항아리는 배수관으로 재탄생했다. 뼈와 손톱은 장신구 같은 것의 소재로 되팔 수 있었고, 머리카락은 가발의 도구가 됐다. 짐승들의 시체를 치우면 시 정부로부터 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도시의 청결을 유지하는 대가였던 셈이다. 운이 좋으면 철과 같은 금속을 주을 때도 있었다. 이때는 시쳇말로 '땡잡은' 날이었다.
돈이 생기는 곳에는 언제나 폭력이 난무한다. 오늘날의 마피아가 그렇고 조직폭력배가 그렇다. 넝마주이라고 다르지 않다. 파리의 시포니에들은 등에 보따리나 망태를 두르고 한 손에는 갈고리를 들고 다녔다. 쓰레기를 주을 때 유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용도도 있었다. 갈고리는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끝이 뾰족해 자신의 구역에 다른 넝마주이들이 들어왔을 때 이들을 공격해 쫓아내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너나없이 쓰레기 줍기에 뛰어드는 시절, 자신을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혼자가 힘들면 여럿이 함께 뭉쳤고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거지 대장인 '왕초'는 넝마주이에도 존재한다.
쓰레기로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헐값에 팔아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나마도 밤에는 해가 지고 다음날 다시 해가 뜰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자칫하면 도둑이나 강도로 오해받을 수 있어서다. 그들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해가 지고 다음날 오전 5시까지 넝마주이들이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이 시간에 망태를 메고 나오면 경찰들에게 끌려가기 일쑤였다. 결국 돈을 벌려면 낮에 남들보다 열심히 거리를 헤맬 수밖에 없다.
쓰레기를 모으면 도대체 얼마나 벌 수 있었을까. 19세기 영국 풍자잡지 '펀치(Punch)' 공동설립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헨리 메이휴가 쓴 '런던 노동자와 빈민(London Labour and the London Poor)'에 그 자세한 설명이 있다. 당시 런던 넝마주이들이 쓰레기들을 주워 벌어들인 금액은 하루 평균 5~6펜스 정도였다. 8펜스를 번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 같은 시기 런던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임금은 약 20~30펜스, 오늘날의 가치로 하면 2~3달러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할 때 넝마주이들은 하루 0.1~0.2달러 정도 번 것으로 추정된다. 원화로 치면 130~260원 정도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하루 최저임금이 9860원이었으니 그 40분의 1 또는 80분의 1도 안 되는 돈이다. 이 정도 수입으로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다 쓰러져가는 천막이나 더러운 하천 인근은 이들의 보금자리고 길거리에 버려진 음식들이 한 끼 식사일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는 종류와 질에 따라 값이 달랐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헝겊은 보통 5파운드(2.3kg) 당 2 펜스씩 받았다. 어쩌다 깨끗한 흰색 헝겊을 발견하면 대박이었다. 일반 헝겊보다 5배 이상 비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하루의 별따기만큼이나 드물었다. 게다가 진창인 거리에 떨어진 헝겊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기란 기적에 가깝다. 금속을 줍는 날은 횡재를 한 날이다. 구리, 납, 놋쇠 제품을 주으면 헝겊의 10배가 넘는 파운드당 4~5펜스를 받았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개똥도 수집 대상이었다. 개똥 수거인들에게는 특별한 이름이 붙여졌다. '순수한 수거인(Pure Finder)’. 가장 더러운 것은 줍는 이들에게 '순수'라는 단어를 붙인 것이 아이러니하다. 1850년대까지 약 200~300명이 영국 런던에서 이일에 종사했다. 초기에는 주로 여성들만 이일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돈벌이가 되면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수요는 많았다. 당시 가죽으로 된 제품들이 귀족들 사이에 유행을 타며 큰 인기를 끌었다. 가죽장갑, 제봉사, 가죽 구두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죽을 연하게 하는 작업이 필수다. 개똥은 이러한 일을 하는데 가장 유용한 재료였다.
돈은 상대적으로 많이 벌었다. 제화업체 같은 곳에서는 한 양동이에 8~10펜스씩 지불했다. 남들이 모두 기피하는 작업을 하는 대가였다. 건조하고 석회석과 같이 생긴 것들은 더 많이 받았다. 알라리성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가죽을 길들이는데 최고였기 때문이다. 순수 수거인들은 항상 검은 장갑을 끼고 손잡이와 뚜껑이 달린 양동이를 들고 다녔다. 오물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작 개의 배설물을 주을 때는 맨손으로 했다. 장갑은 더러워지면 버리는 것 외 방법이 별로 없지만 손은 물로 간단하게 씻으면 그만이었다. 위생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서구에서 넝마주이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후반 이후였다. 우리나라라고 다르지 않다. 1961년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전국 부랑아 2만 5000명 중 31%가 넝마주이였다. 아이들 중 약 7000명 이상이 망태기와 집게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서울 어디를 가도 빈병과 폐품을 줍는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넝마주이는 1961년부터 칼바람을 맞았다. 1960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넝마주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사실 넝마주이는 도시민들이 볼 때 더러움의 상징이었다. 찢어지고 오물투성이인 옷에 시궁창 같은 집에 사는 이들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 이들이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구역을 지키기 위해 다툼도 잦았다. 강도, 살인, 패싸움은 항상 이들을 따라다녔다. 기피의 대상을 없애주겠다는데 반대하는 여론은 어디에도 없었다. 군사정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부랑아에 대한 집단 수용이 이뤄졌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넝마주이를 정상적인 직업인으로 전환하겠다는 명분 하에 일제 조사가 이뤄졌고 경찰 등 공권력이 이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집단 수용도 뒤따랐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부랑아 2000명을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일부는 대관령으로 보냈고 일부는 산업역군으로 포장돼 간척지 개간 사업으로 내몰렸다. 지금은 제철소가 들어선 광양만의 개간 사업도 이들로부터 시작됐다.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국가폭력은 20년 뒤 신군부의 권력 찬탈 이후 또다시 재연됐다. 서울 강남 수십억짜리 아파트를 마주 보고 있는 구룡마을가 포이동 266번지는 그 역사적 산물이다.
일거리가 줄어든 것도 넝마주이가 설 땅을 빼앗았다. 아파트와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닦여 삶의 터전을 잃은 데다 도시 위생이 강조되면서 쓰레기처리 시스템이 발달한 탓이 컸다. 게다가 기업이 폐기물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강제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일도 공공이 맡으면서 넝마주이들은 할 일을 잃었다. 특히 1994년 실시된 '쓰레기 종량제;는 이들에게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이제 표면적으로 거리는 이전보다 더 화려하고 깨끗해졌다. 넝마주이는 완전히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도 넝마주이는 존재한다. 단지 연령이 높아지고 이동 수단이 달라졌을 뿐이다. 도시 곳곳에서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고 다니는 어르신들이 그 주인공이다. kg당 100원도 안 되는 종이를 줍기 위해 하루 6시간 가까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이분들은 돈을 벌어서 무엇에 쓸까. 물론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 지출한다. 자신을 위해 쓰는 것만이 아니다. 같은 처지의 약자들을 돕기 위해서도 나선다. 생계비를 아껴 기부를 하고 기초연금을 모아 쪽방 노인들에게 들고 가는 어르신들이 한 둘이 아니다. 기념일처럼 연말연시에 성금을 내는 기업이나 재벌들의 몇 백억 원보다 어르신들의 1만 원이 더 값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