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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Aug 10. 2020

완벽한 하루

아이와의 제주 보름살이 여섯 번째 날 - 산굼부리, 방목지, 한라산둘레길

이동시간이 긴 곳으로 가야 하니 평소보다 좀 서둘러 나왔지만 역시 윤이네와 시간을 맞추지는 못했다.

5.16 도로를 타고 본격적인 오르막길에 들어서는데 벌써 산굼부리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오르막 도로를 나만 달린다고 빨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먼저 돌아보고 있으라 하고 나는 숲길 드라이브를 즐겼다. 맑은 가을의 울긋불긋한 숲터널은 정말 아름다웠다. 운전의 성가심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산굼부리


드디어 산굼부리.

몇 년 전 초겨울에 혼자 왔을 때 철 지나 색이 바랜 억새를 보며 꼭 가을에 다시 한번 와봐야지 했는데, 왔다 아들이랑.

시간을 보니 윤이는 벌써 정상에서 반은 내려왔을 것 같다.

가장 짧은 오르막 코스를 택했다.

우리 예쁜 아드님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역시나 안으라고 난리다.

오냐, 예상했다.

아이를 둘러업고 열심히 오른다.

바람이 좋다.


산굼부리 - 분화구


그리 높지 않아서 정상이랄 것도 없이 정상이다.

아이를 내려놓고 분화구를 내려다보며

언젠가 곰이와 이게 무언지 이야기하면서 함께 볼 날이 올까, 생각한다.

없어도 괜찮지만, 그런 날이 있으면 좋겠다.



엄마가 업어주지도 않고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으니 아들은 서운하다.

서럽게 울면서 쫓아다니는 모양이 우습다 못해 귀엽다.

제철답게 사람은 많고 아이가 우니 제대로 사진을 찍기는 글렀지만 엄마는 괜히 신난다.


우리끼리였다면 아이를 업고 먼 길로 둘러서 천천히 내려가겠지만,

오늘 육지로 돌아가야 하는 식구들이 아래에서 오래 기다릴지도 모르니 다시 빠른 코스로.

 내리막길은 그래도 좀 걸어보라고 도망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래, 다섯 살짜리에게 억새는 그냥 기다란 풀일 뿐이다.



그래도 다 내려오니 곰이가 맘에 들어한 게 있었다.

꽃송이로 만든 "+ = ♡ "

아이는 그림이나 캐릭터보다 글자, 기호를 더 좋아한다.

그림은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글자는 모양이 일정해서 알아보기 쉬우니까,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냥 짐작할 뿐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그뿐.



곰이는 세 돌 즈음부터 글자를 알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숫자를 기억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수 개념과 상관없이 단순히 1을 일이라 읽는 걸 아는 수준이었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 혼자 놀던 아이가 "Y"를 찾아보라는 장난감 목소리에 Y를 찾아 누르는 걸 우연히 보고 A는? H는? 하면서 확인해보니 발음이 비슷한 몇 개를 빼곤 알파벳을 모두 외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소문자 패드로 바꾸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알파벳 소문자도 거의 외우고, 같은 대문자와 소문자를 연결하기도 했다.


처음 며칠은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부부가 신이 나 저녁마다 알파벳 놀이를 했다.

그러다 곧 자폐 성향을 가진 아이들이 말을 하기도 전에 문자를 깨우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얼마간 곰이가 글자나 기호를 가리킬 때 나는 복잡한 기분이 됐다.


지금 곰이는 한글도 알기 시작해 통글자를 50개 이상 알고 ㄱ,ㄴ,ㄷ 도 이해하는 것 같다.

연령을 1년 이상 낮추어 보고 있는 호비도 이제 누리과정에 들어가 한글, 수, 영어 학습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데, 곰이의 반응은 굉장히 뜨겁다. 자기가 잘 알고, 관심 있는 거니까.

입학 전에 한글 떼느라 고생하는 아이도 많다는데, 이 수고 하나는 덜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슬프지 말자. 감사하자.


산굼부리를 다 내려가 입구에 가서야 윤이네를 만났다.

한 살 차이 말 못 하는 곰이도 오빠라고 만나면 "오빠, 오빠" 하며 반가워하는 윤이와 아이를 나란히 앉혀놓고 처음으로 투샷을 찍었다.

아 그런데 예쁘다. 보다는 웃기다.

잘 어울리기보다는 어색해 보여서. ^^


산굼부리 입구에서 곰이와 윤이


어정쩡하게 앉다가 도로 일어나는 곰이에게, 고맙게도 윤이 엄마는 숙녀 체중을 감춰줄 줄 아는 매너남이라 칭해주었다. ^^


변덕스러운 제주의 하늘이 이렇게나 좋은 날 서둘러 다시 육지로 가야 하다니,

윤이 엄마 얼굴에 아쉬움이 묻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깝다며 근처 사려니숲길에 들렀다 가자고 출발했지만

차를 세워둘 수 없는 곳을 내비게이션 목적지로 찍고 빙빙 돌다가 이내 포기했다.

제주마방목지가 있다는데 거기나 잠깐 들러서 말 보여주고 간다고 한다.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제주마방목지


사려니숲길을 다시 찾아보기 위해 큰 길이 나오면 유턴해야지 하고 가는데,

마침 나오는 큰 길 길목에 방목지 주차장이 있다.

들어가서 차를 내리니 윤이네가 보인다.

이산가족 상봉. ^^

말 본다며 잔뜩 기대에 찬 윤이와 세상 아무 관심 없는 곰이를 데리고 넓은 초원으로 나갔다.

말은 없고 까마귀는 많다.


윤이네를 보내고 주차장을 둘러보다 현수막을 보고 알았다.

제주마방목지에서는 10월까지만 말을 볼 수 있다는 걸.

그 날은 공교롭게도 11월 1일이었다. 아, 이런.

윤이 할머니께서 마지막 선물로 한라봉 주스를 쥐어주고 가셨다.

그날부터 곰이는 하르방 페트병에 든 한라봉과 감귤 주스를 무진장 마셔댔다.



사려니숲길_한라산둘레길


우리는 다시 둘이 되어 사려니숲길 주차장을 찾았다.

여기가 맞나 싶어 차를 가지고 들락날락 좀 했다.

내비게이션에서 사려니숲길을 검색하면 여러 곳이 나온다.

맨 처음 입구가 막혀 있어 주차하지 못하고 빙빙 돌았던 곳은 A 사려니숲길 입구이다.

지금은 또 어떤지 모르겠다.

전에 혼자서 갔을 때에는 입구의 울창한 삼나무 숲과 붉은 흙이 참 아름다웠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삼나무 향이 진했다.

사려니숲길 입구 찾기

그리고 이 날 아이와 둘이 찾아간 곳은 D 한라산둘레길 사려니숲길 입구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공터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속 오솔길을 산책하는 재미가 있다.

사려니숲길 입구 쪽으로, 또는 물찻오름 방향으로 여러 길이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많지 않고, 그래서 굉장히 조용했다.

까마귀 소리를 실컷 들을 수 있다. ^^


사람들이 사려니숲길을 다녀왔다고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곳은 F 사려니숲길 붉은오름 입구이다.

주차장도 넓고, 사람들이 많아 푸드트럭도 꽤 있다.

산책길도 크고 깨끗하게 닦여져 있고, 중간에 삼나무 숲길도 멋지다.

유모차를 가지고 가볍게 산책하다 다시 나올 거라면 이곳이 적당하다.

그리고 숲이 우거져 굉장히 시원하다.


한라산둘레길(사려니숲길) 산책


산책길에 들어서며 지도를 보니 숲길이 굉장히 길게 이어져 있다.

어차피 우리는 어느 한 지점까지 완주할 수 없으니 그냥 편하게 걷다가 되돌아 나오자.

조용하고 인적 드문 숲길에 까마귀 소리가 울리니 곰이는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울창하지는 않은 편이라 햇빛이 밝게 들어오고,

자주 등장하는 돌들을 피해 다니며 고사리 구경도 하다 보니 금세 괜찮아졌다.

이 날 처음 알았다.

곰이가 숲길 산책을 즐길 줄 아는 아이라는 걸.


엄마를 쫓아다니기 바쁘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흥얼흥얼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일에도 꽤 관대해졌다.

꽃을 가리키기도 하고, 흙길이 조금 가파르면 손을 잡아달라고 내밀었다.

처음 들어설 때는 약간 더웠던 숲길이 선선하다고 느껴질 때쯤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나왔다.

돌아올 때는 아이를 업고 더 느리게 걸었으니 왕복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우리의 산책 코스는 아마 굉장히 짧았을 것 같다.

사려니숲길을 그렇게 찾아 헤맸건만 삼나무 근처에도 못 가보고 산책이 끝난 셈이다.

곰이가 좀 더 크면 우리도 붉은오름~물찻오름 코스 정도는 걸을 수 있을까.

아이보다는 내가 더 문제일 것 같지만. ^^


사려니숲길로 가는 한라산둘레길 입구에서


사려니국수, 수망일기, 매일올레시장
 

   

사려니숲길 욕심에 점심이 많이 늦어졌다.

남조로를 타고 숙소 내려가는 방향으로는 가까운 식당이 없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거꾸로 올라갔다.

아이랑 둘이서 가든 들어가는 식당은 그렇고... 국숫집 간판이 보인다.

모르겠다, 일단 가자.


곰이는 국수를 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 먹을 국수 하나만 달랑 시켜놓고 아이 도시락을 꺼내 먹일 용기가 나지 않아 돔베고기 작은 걸 하나 더 달라고 했다.

아이도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도시락 반찬을 해치우고, 돔베고기를 잘라 주었더니 곧잘 받아먹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 식욕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라, 식당 음식도 받아먹는 걸 보며 나는 한층 고무되었다.

배도 고팠고, 고기국수는 처음 먹는 거라 당시에는 비교 없이 그저 맛있게 먹었다.

나중에 다른 곳에서 더 먹게 되면서 알았는데, 꽤 맛있는 집이었다.

국물도 진하고, 고기가 얇은 대신 상당히 연한 편이라 퍽퍽한 게 별로인 내 입맛에 맞았다. 


점잖게 밥 잘 먹는 아이가 예쁘다며 천천히 더 있다 가라는 사장님한테서 귤을 받아들고,

도착할 때와는 달리 둘 다 아주 느긋하게 다시 출발했다.



다시 숙소까지는 40분.

차를 많이 타서 아이도 지겹겠지만 운전하는 나도 좀 쉬고 싶었다.

전에 왔을 때 성산에서 중문 쪽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한 번 쉬려고 찍어둔 카페가 있었다.

거기 가자.


제주 남원 수망일기


원래 카페 들어가서 사진 찍고 그러는 성격이 아닌데,

다행히 손님이 우리 말곤 없었고 내부가 워낙 예뻤다.

이상하게 커피가 당기지 않아 한라봉뱅쇼를 시켜봤는데

뜨거운 기운이 뱃속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것 같은,

남아 있던 감기가 다 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곰이도 분위기가 편한지 일어나 돌아다니며 인형 구경을 했다.

아, 오늘 왜 이렇게 완벽하지?


제주 수망일기 - 아드님과 한라봉뱅쇼


그리고 기다리던 금요일이었다.

제주에 사는 친구네가 숙소에 와서 자기로 했으니 매일올레시장에 가서 먹을거리를 사다 놔야지.

회도 뜨고, 새우튀김에 대게 그라탱이며 어묵도 사고, 곰이 먹일 떡갈비까지 잔뜩 장을 보는 동안 곰이의 컨디션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피곤할 만도 하지.

아이를 등에 업고, 먹을거리를 주렁주렁 손목에 매달고는

이 가을 저녁에 땀을 비 맞듯 흘리며 쇼핑을 마쳤다.

아, 죽더라도 이거 먹고 죽어야 하는데...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에서


긴 하루는 즐거운 파티로 막을 내렸다.

다 같이 맛있게 저녁을 먹고, 엄마들의 수다는 맥주와 함께 끝없이 이어졌다.

나이 차이가 꽤 있는 형아와 누나는 마치 삼촌 이모처럼 곰이와 잘 놀아주었다.

깔깔깔, 깔깔깔 늦게까지 엄마도 찾지 않고 놀던 아이는 완전히 녹다운이 되어 스스로 방에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숙소에서 곰이가 너무나 좋아하는 형아 누나와 함께


하루가 이렇게 완벽해도 되는 거니?

제주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기운 없는 아이와 보름을 어떻게 다닐까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아이 하나 키우는 일이 왜 이렇게 끝도 없이 힘이 들까 머리가 아팠는데.

낙담하지 말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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