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아이가 내 삶에 준 선물.
부모화 성장의 대물림을 끊으며.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
그를 대하는 자식의 올바른 자세는 무엇인가.
전화 저 편 아버지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두 달여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는 다급하게 아버지 이야기를 하셨다.
다시 전립선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 수술 전 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몇 년 전 한차례 수술 이후 계속 약을 드시고 계신 걸 알고 있었고, 검사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으므로 차일피일 전화를 미뤘다.
마흔을 넘기면서 나도 여기저기 고장이 나 매년 시술이냐 수술이냐를 하는 마당에, 칠순이 내일 모레인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그렇게 놀랍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전화 한 통화는 해야겠지... 신경은 쓰였다.
아버지와의 통화는 한 달만이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삶의 막연한 희망이었다.
지금 같으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지만 불과 십여 년 전 나는 서른셋 다 늦게 시집간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우습지만 그런 이유로, 양가 부모님은 행여나 혼사가 깨질까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스럽게 결혼을 진행하셨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는 남편에게 나를 일컬어 "내 인생의 희망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잘난 딸이 어느 날 짜잔 하고 판검사가 되어 당신의 보잘것없는 인생을 자랑스러운 백 점짜리로 만들어주는 꿈같은 희망을 품기도 하셨지만, 딸에게는 부모의 지원 없이 내 피땀만으로 출세를 해보겠다는 욕망도, 그럴 자신감도, 보란 듯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세속적인 효심도 없었다.
딸이 출세를 하려고만 한다면 아버지는 까짓것 남은 힘을 모아 지원을 해보겠다는 욕심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그 책을 꼭 사야 하는 게 맞냐고 되물으며 돈을 꺼내 주실 때마다 책 욕심 많은 딸을 못마땅해하시던 엄마는, 정말이지 지지리도 공부 못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과외교사를 붙여 주시는 양반이었다.
밑으로 동생이 둘이나 있는데, 더욱이 아들 교육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큰아들도 아닌 큰딸의 출세를 위해 사력을 다해 주실 분이 아닌 걸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엄마가 대학원 진학 이야기를 단칼에 자르고 난 후 나는 얼마간 젊음을 낭비하다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희망은 작게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워하셨다.
취직과 결혼을 거치며 나는 급속도로 경제적인 안정을 찾았고, 부모님께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사이 급격하게 늙으시며, 이따금씩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너한테 해준 게 별로 없는데, 부모라고 뭘 자꾸 해주려 하지 마라."
키워놓고 보니 딸이 최고라며 받는 일에 거리낌이 없던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기브 앤 테이크 이론을 꺼내놓으며 겸연쩍어하셨다.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엄마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렵게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출근하는 대신 친정의 생계 절반 정도를 책임지기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아이가 장애 진단을 받았다.
밥만 제때 챙겨 먹여도 저희끼리 쿵짝 맞추며 쑥쑥 잘 컸던 삼 남매의 엄마는 손주도 밥만 먹이면 되는 줄 아셨던 것 같다.
처음에는 아이를 소아과에 데려가라고 하니 병원 문 닫기 전에 조퇴하고 오라며 전화를 하셨고,
혼자 감각추구에 열중하는 손주를 경로당 한쪽에 앉혀두고 고스톱 놀이를 즐기셨다.
월요일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에도 12시가 넘어서야 경로당에서 올라오시곤 했는데, 그걸 두고 딸에게서 몇 마디 듣자 "그럼 나 애 못 봐준다."는 으름장을 놓으셨다.
나는 당황했다.
출퇴근하며 아이 재활치료를 다니는 살인적인 스케줄이 이어졌다.
주에 한 번 엄마가 언어치료를 데려가셨고, 다른 한 번은 토요일 오전에 내가 맡았다.
감각통합치료도 해야 한다기에 한 번은 저녁 7시에 잡아 6시 땡 퇴근해서 아이를 데리고 달리기를 했고,
다른 한 날은 매주 2시간 조퇴를 쓰며 눈치작전을 폈다.
그러다 놀이치료도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에게 주에 한 번 더 수고해주실 수 없겠느냐 부탁조의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NO 였다.
나는 궁지에 몰렸고, 휴직이라는 고민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내 경력단절도 문제였지만, 친정 생계문제 때문에 휴직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선택지였다.
하지만 막상 엄마에게 거절당하고 나니, 에라 나도 모르겠다가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쁜 딸년이 되었다.
그때 엄마가 거절하지 않았어도 아마 나는 결국 휴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다. 원망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휴직 전후로 나는 여기저기 많이 아팠고, 수술과 입원 등의 일들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엄마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며 감정이 상했다.
감정이 상하자 원망이 나를 지배했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며, 사는 일이 다 억울하던 시기였다.
나는 부모의 요구와 사정에 내 인생을 맞춰 왔는데,
내 자식에게는 아무것도 원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게,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었다.
나는 줄곧 당신 사정 봐가며 살아왔는데, 그런 내 사정은 아랑곳없이 엄마는 왜 내게 일방적인 딸 노릇만을 요구하는가...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엄마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그게 일 년이 조금 더 되었다.
명절이나 생신 때 용돈을 부쳐드리고 잠깐씩 통화는 했지만 코로나가 적당한 구실이 됐다.
나쁜 딸년이라고 욕을 먹어도 하는 수 없다.
나는 엄마에게 원망을 쏟아붓거나 울고불고 투정하는 딸로 살아본 적이 없었고,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의 미묘한 억양도 척하고 알아듣고 필요한 걸 해드리는 영리하고 착한 딸이었다.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힘든 딸한테 왜 예민하게 구냐며 놔두라고 엄마를 나무라시다가,
엄마한테 연락 좀 하라고 내게도 지나가는 잔소리를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아시는 것 같다.
당신 큰딸이 이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실 수도 있겠다.
철저히 부모화된 아이로 성장기를 보냈다는 걸,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많이 부족한 부모였던 건 맞지만, 그게 그분들 탓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두 분은 너무나 가난했고, 본인들 또한 부모에게 받은 것 없이 자랐으니 뭘 주어야 하는지도 모르셨을 거다.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사는 성남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배운 것 없던 젊은 두 사람이
그래도 열심히 일하고 모아서 집 한 채 마련하고 자식 셋을 키우셨다.
그 삶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나는 쭉 지켜봤고, 그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두 분 삶을 존경한다.
그러니 나중에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 드려야지, 그러면서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만 열심히 살았으면 좋으련만,
나는 바로 지금, 두 분의 힘을 덜어드리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일곱 살 때부터 쌀을 씻어 밥을 안치거나 보일러 연탄을 갈아 넣으며 남다른 재주를 뽐냈고,
열 살 때 부모님이 제주도 단체여행을 가신 며칠간 여덟 살, 다섯 살 두 동생의 밥을 챙겨 먹이며 집을 지켰다.
사는 게 녹록지 않았던 만큼 부부싸움의 강도와 주기는 언제 가정이 깨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동생들을 피신시킨 후 아버지를 말렸고
깨진 유리를 쓸어 담으며 가정이 아닌 유리가 깨진 것에 다행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들에게 혹시 이혼하시면 너희는 엄마를 따라가라, 나는 아빠 밥을 챙겨드려야 하니 아빠랑 살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공부를 꽤 잘했지만 진로를 결정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했던 건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이었고,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하고 싶고, 무엇이 되어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성남에서 그렇게 크고 있던 친구들이 적지 않았기에, 80년생 중에 그렇게 자란 아이가 많지는 않다는 걸 나는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돌아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부모의 삶에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다 크고 나서 늙으신 부모에게 가지는 감정이라면 모를까,
어린아이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나는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 파트너 인양,
그들을 위로하고, 기꺼이 그들 삶의 희망이 되어주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면서
어른으로 아이 시절을 살았다.
부모가 나였고, 내가 곧 부모였다.
어쩌면 그들의 부모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고 자랐더니,
결국 나는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냥 '어른스러운 아이'에서 멈추고 말았다.
발달에도 다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는데 그게 뒤죽박죽 엉켜서 균형을 잃으면 일상에 불편을 주는 장애가 된단다.
표면적인 일상에 불편을 주는 건 아니니 장애라고 명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내 성장은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다 자란 듯 자라지 못한 정체성 장애가 되어버렸다.
나 또한 부모가 되고, 부모의 마음과 삶을 이해하게 될 법한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이제 겨우 나 자신과 부모를 분리해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길의 끝에서.
아이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이의 장애를 알고 그렇게나 억울하고 원통했던 이유, 거기에 답이 있었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고 믿음직한 사람으로만 살았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자식에게도 그 길을 강요하지 않았을지.
그리고 그 아이에게 나는,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이 있지 않았는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길이,
내가 걸어왔고 이어서 가라고 강요했을지 모를 길이,
깨닫지 못했던 내 잠재된 욕망을 실현할 길이,
막혔다.
억울하고 원통해도 지나온 길을 되짚어 돌아갈 수는 없기에,
나는 그 길 위에 내 부모를 남겨두고
길 밖에 서 있는 아이 손을 잡고 가려한다.
나도 다 자라지 못했기에 무섭고 불안하지만,
다 늙으신 부모님께도 죄송하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엄마도 이제는 나한테서 독립하셔야지.
신은 다 계획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