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이란 이름의 욕망이 불러온 집착
'격정 출산 누아르'라는 신개념 장르로 소개되는 <산후조리원>은 총 8회로 알차게 제작된 웰메이드 드라마다. 출산 직후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기 전 2주간, 엄마들은 주로 산후조리원에서 몸을 추스른다. 이곳에서 앞으로 펼쳐질 육아와 엄마들의 세계의 예고편을 맛보게 되는데, 드라마는 그 과정을 무척 사실적이고 재미있게 보여준다. 주인공 오현진/딱풀이 엄마(엄지원 분)는 잘 나가는 기업의 상무이지만, 노산에 초산, 모유까지 적어 엄마들 사이에서 꼬리칸 신세를 면치 못한다. 조은정/사랑이 엄마(박하선 분)는 쌍둥이에 이은 셋째 자연 출산에 완모를 해낸 조리원의 여왕으로 그려진다. 둘 외에도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엄마들의 이야기와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는 출산 후 고통과 걱정이 고스란히 그려져 수많은 엄마들의 지지를 받았다.
임신은 고달프고 출산은 잔인하고 회복 과정은 구차하죠.
하나하나 뜯어보면 현실적이고 감동적인 부분들이 많지만, 그중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박윤지/쑥쑥이 엄마(임화영 분)'이야기였다. 갓 조리원에 들어와 모든 것에 낯설어하는 딱풀이 엄마의 길잡이가 되어 준 쑥쑥이 엄마는 귀엽고 말똥말똥한 표정으로 유독 딱풀이에게 애정을 쏟았다. 유치원 교사 출신이라는 그녀는 아이가 울면 능숙하게 안아 달래주며 진심으로 딱풀이 엄마를 돕는 듯 보였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있다는 설정 때문에 유독 안쓰러워 보였는데, 알고 보니 드라마 후반부에 큰 충격을 선사하는 반전의 역할이었다.
쑥쑥이 엄마의 정체는 사실 드라마 초반부터 떡밥을 남겨왔다. 늘어난 딱풀이의 모유와 뜬금없이 등장하는 메모, 복직을 고민하는 딱풀이 엄마에게 '아기는 엄마가 키워야죠' 라며 차가운 멘트를 날리는 모습 등등. 중간중간 스릴러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장면에도 쑥쑥이 엄마가 존재했었다. 사실 쑥쑥이 엄마 윤지는 아이를 사산한 채 조리원에 들어왔다. 아이를 잃은 아픔에 식음을 전폐하다 새로 들어온 딱풀이와 딱풀이 엄마에 묘한 시기심을 느끼며 스토킹을 시작한 것이다. 친절한 모습으로 딱풀이 모자에게 다가가 친해졌지만, 딱풀이에게 자신이 추천한 '건우'라는 이름 대신 '라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걸 알게 된 후 진짜 스릴러가 본색을 드러냈다.
'라온'이가 된 딱풀이에 분노를 숨기지 못했던 윤지는 마지못해 현진에게 사과를 하러 간다. 이때도 딱풀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딱풀이에 실제 엄마보다 더 빨리 반응하며 아기를 안아 든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현진은 그녀가 가져온 선물을 보고, 그동안 쑥쑥이 엄마가 딱풀이에게 보여 온 애정이 정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쑥쑥이 엄마는 '엄마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며 현진을 몰아붙이고, 아기를 납치라도 할 듯 위태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 '딱풀이'라는 태명을 가졌던 자신의 아이 대신 현진의 아이를 스토킹 한 사실이 드러나고, 조리원 원장과 그녀의 남편이 등장하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된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요. 다 포기하고 아이만 생각했는데도 아무것도 없다고.
당신이 진짜 딱풀이 엄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사회적으로 성공한 현진이지만, 엄마로서 스스로에게 늘 부족함을 느껴왔기에, 윤지의 말들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아이를 두고 복직을 해야 하는 현실에 누구보다 깊은 고민에 빠지는 사람은 현진 자신임에도, 누군가의 눈에는 소중한 보물을 가지고도 불평만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극적인 설정을 통해, 드라마는 늘 죄책감에 시달리는 엄마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윤지의 행동은 범죄고, 현진에게 쏟아붓는 말은 망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진에게는 너무도 가슴 아픈 위협이자 공격이 된다. 현진과 윤지 둘 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정이다.
쑥쑥이 엄마도 처음부터 미쳐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결혼을 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남편을 닮은 아들을 원했고 임신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 신발을 들여다보며 핑크빛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임신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고, 매달 반복되는 실망에 점점 기운을 잃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초초 매직으로 내 눈에만 보이는 임신테스트기 사진을 인터넷 카페에 올려보지만, 단호박 같은 한 줄의 임테기만이 냉정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결국 병원을 찾은 현지는 난임 시술을 결심하고, 약물과 주사와 그에 따른 부작용을 감내하며 아이를 기다린다. 몸이 조금 상하더라도 천사 같은 아이를 만날 수 있다면 괜찮을 거라는 마음으로 한 달 한 달을 보내보지만, 임신이 되는 것도 임신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힘들면 포기하자고 하는 남편의 말에도, 엄마가 되고 싶은 윤지의 마음은 쉽사리 위로받지 못한다. 언젠가 찾아와 줄 아기천사만이 이 아픔을 낫게 해 줄거라 믿는다.
긴 노력 끝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임신을 하고, 어렵게 윤지를 찾아온 새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윤지는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만이 남은 줄 알았던 그녀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오고, 결국엔 아기의 울음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사산을 한다. 열 달을 품은 아이의 생명이 꺼져있음을 알면서도 산모의 고통을 똑같이 겪어야 했던 윤지의 마음은 이제 해어질 대로 해어져버렸다. 차마 아이를 놓아줄 수 없었던 윤지는 산후조리원에서 다른 엄마들과 똑같이 몸을 추스리기로 한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에라도 엄마로 살게 해 주라. 보통 엄마들처럼.
처음부터 윤지가 바라던 삶은 평범한 엄마가 되어 아이를 기르는 삶이었다. 그런 삶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터다. 아이가 주는 행복과 힘듦을 그린 드라마 속에서 아이를 잃은 슬픔을 보여준 쑥쑥이 엄마에게 유독 눈길이 갔던 건, 내가 처한 상황에서 아주 가끔 하게 되는 무서운 상상 때문이다. 아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내 몸이 상하더라도 꼭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 잠시나마 내게 머물렀던 생명을 잃었던 아픔. 이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생겨났던 감정은 아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모성이었다. 이런 모성을 간직한 채 윤지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녀처럼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는 내게 무시무시한 호러에 가까웠다.
쑥쑥이 엄마의 정체는, 안타깝지만, 소중한 아이를 잃은 슬픔에 이성의 끈마저 놓아버리고 집착과 광기를 보이는 여성이다. 그녀의 위협적인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남의 것을 탐하며 빼앗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모성이라는 이름의 욕망이라 해도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윤지의 딱풀이는 현진의 딱풀이가 될 수 없다. 각자의 인생에 주어진 짐은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아기의 묘에 찾아가 '하루 하루 너를 잊어가는 것이 엄마의 꿈'이라 말하는 윤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그녀의 잘못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저 하루빨리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드라마 <산후조리원>은 나에게 완벽한 픽션이다. 나도 임신과 출산을 하면 저런 일들을 겪게 되겠구나 짐작은 해왔지만, 실제로 겪어본 일은 아직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 덕분에 일종의 3D 체험을 해 본 기분이다. 그동안 여성의 출산과 그 이후의 과정은 짧은 대사나 뻔한 클리셰로 범벅된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반해 <산후조리원> 은 밀도 있게 여성들의 어려움을 그려내면서도 재미와 감동을 놓치지 않았다. 쑥쑥이 엄마에 가장 마음이 동요하기는 했지만, 전업맘, 워킹맘, 남편들의 고충, 결혼제도, 베이비 시터, 엄마에 대한 애틋함 등 출산 직후 겪는 어려움을 다각도로 보여주어 모든 에피소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적이면서도 드라마다운 드라마였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