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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Mar 01. 2023

마흔의 첫 수술 제왕절개

드디어 만났구나 우리가


태금이 와의 첫 만남은 순탄했다. 아니, 순탄할 거라 믿었다. 대학병원에서 검진을 받으며 초음파로 잘 자라는 모습을 보았고 무서웠던 양수검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막달까지 머리가 위로 향한 역아라 제왕절개를 선택했고 교수님과 날짜 협의도 일찌감치 끝냈다. 수술날짜이자 태금이의 생일을 열흘 앞두고 남편이 코로나에 걸리는 치명적 사건이 있었지만 이 역시 무사히 지나갔다. 출산 전 일주일을 태금이와 나 단 둘이 보낸 점은 아쉬웠으나 코로나에 걸려 출산 병원을 찾아 헤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출산 당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수술대에 누우니 갑자기 긴장이 되며 온몸이 떨렸다. 하반신이 제대로 마취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는 팔뚝의 감각마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겁이 났다. 수면마취를 해달라는 말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아이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마취를 하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나치게 긴장한 내게 숙련된 간호사는 '아이를 생각하며 편하게 숨을 쉬어보라'고 조언했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세상 쫄보가 되어 있는 사이 에에엥~~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쌍꺼풀이 있네요'라는 교수님의 여유 있는 목소리에 내가 진짜 엄마가 됐음을 인지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작고 까만 아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무사히 출산했다는 안도감을 안고 회복실에서 일반병실로 향했다. 상기된 남편의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아기 사진을 찍어온 남편은 신나게 핸드폰을 보여줬다. 자연분만은 일시불, 제왕절개는 할부로 아프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냐는 농담을 나눴다. 아프면 누르라고 했던 빨간 버튼을 꼭 쥐고 수술이 끝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랍쇼.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극심한 통증과 함께 아래로 무언가 왈칵 쏟아졌다. 이게 그 오로라는 건가 싶어 남편을 찾았다.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리다.


말로만 듣던 과다출혈이었다. 자궁 무기력증으로 근육에 힘이 빠지면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여러 명의 의사가 나를 둘러쌌고 링거 줄이 주렁주렁 걸렸다. 출혈이 잡히지 않아 색전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자궁근종색전술은 자궁으로 가는 혈관의 일부를 막아 출혈을 막는 시술이다. 피를 많이 쏟아서 어지럽고 졸렸지만, 심하면 자궁적출을 할 수도 있으니 동의하셔야 한다는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외동확정이라고 떠들어왔는데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 불안함과 심란함에 동의를 하고 다시 시술실로 옮겨졌다. 국소마취로 허벅지 안쪽을 뚫어 진행되는 시술은 상상 이상으로 괴로웠다. 수혈이 잘 되지 않아 쇄골 쪽 동맥에도 주사 바늘을 꽂았다. 잠들면 안 된다는 말에 병실 밖에 있을 남편과 아이를 떠올렸다.


남자들 군대 얘기 못지않은 여자의 출산 스토리는 여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건강하게 아이를 만났다. 시술  때 통증이 컸기 때문인지 제왕절개 후의 과정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졌다. 허리도 못 펴고, 걷는데 이틀이 걸리고, 피를 엄청 쏟았으며, 4박 5일 잠을 못 잤지만. 각오하고 있던 일이라 견딜만했다. 무엇보다 자궁적출 없이 시술이 끝나 다행이었다. 유서를 써놓고 출산하러 들어갔다는 친구의 일화가 떠올랐다. 출산은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


어렵사리 몸을 추스르고 신생아실에서 유리창 너머로 만난 태금이는... 까맸다. 눈이 컸고, 머리숱이 많았고, 쪼그맸다. 과하게 흥분한 남편은 아기가 너무 예쁘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끙끙대며 걸어가 아무리 아기를 들여다봐도 좋아 죽겠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생경. 실감이 안 나는 건 둘째 치고,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산후조리원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산후도우미는 괜찮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이 앞섰다. 옆에서 촐랑대는 남편이 없었다면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대한 일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졌는데, 왜 나는 한없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복잡다단한 마음을 품고 퇴원하던 날, 코로나로 보지 못했던 친정 엄마를 병원 구석에서 잠시 만났다. 그나마도 기차 시간이 급해 10분 정도 인사만 나눴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이제 아기만 데려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수고 많았다며 나를 안아주고는 종종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다가 후드득 눈물을 흘렸다. 너무 큰 기쁨과 불안을 한꺼번에 맞이하면 감정이 얼어버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의 허그가 그 얼음을 깨 주었다. 엄마가 나를 낳고 기르고 사랑해주었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엄마의 사랑은 어느 하나 당연하지 않았다. 이제 그 사랑을 내가 아이에게 주어야 할 시간이 됐구나. 엄마처럼, 나도 진짜 엄마가 됐구나.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드디어 만났구나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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