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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Jul 31. 2023

추락하는 나에게 날개달기.

마음의 굳은살과 고통그릇의 크기.

  


  신부님께 전화를 했다. 누군가에게 나의 힘듦, 어려움 같은 건 털어놓지 않으며 살아오던 내가 신부님에게는 나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유일한 존재. 나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신부님은 우리를 같은 종족이라고 부른다.


  "꼭 살아야 돼요?"

 

   전화를 걸자마자 내가 뱉은 첫마디였다. 잠시 스쳐가는 생각이겠지 하고 두었던 것이 마치 화두처럼 며칠 동안이나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며 다른 생각들까지 잠식했다.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삼십 분을 훌쩍 넘긴 통화.


   신부님께서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우리답지 않게 비논리적, 비이성적 사고를 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살면서 흔하게 겪는 남편의 실직일 뿐인데 그 생각이 왜 내가 죽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중간 메커니즘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건 나이가 들어서건 그렇게 논리가 흘러가게 되는 분명한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남편이 실직했다고 죽고 싶어 하진 않는다.  가정의 불화가 생기기도 하고 욕을 하고 싸우기는 하고 누군가는 이로 인해서 이혼을 하게 되기도 하고, 어떠한 여성들은 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지기도 한다. 때로는 원치 않게 남편의 경제능력을 상실하게 된 경우엔 내가 책임질게, 잘살아 보자 하며 꿋꿋하게 삶을 살기도 한다. 별의 별일 다 일어나는 삶에서 단순한 실직이라는 일로 죽음을 생각할 만큼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생각이 그리로 이어지는가?


   왜 이번의 실직은 내 마음을 죽음을 바라보게 만드는가?  이 비논리적 사고패턴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가?   지금까지 실직과 취업 사이에 겪었던 경제적 심리적 힘듦을 다시 겪을 것이 두려워서? 실직과 출산 얼마 후  남편이 내게 행했던 가정폭력의 트라우마?  아니면 공황장애와 우울증인 남편이 이제 다시는 일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  실직한 과정에서 내가 아무런 경제능력이 없는 것에서 오는 쓸모없음으로 인한 자존감 상실?  결혼하고 십오 년 동안 회사생활의 끝이 항상 이런 식이라서?


    그 어느 이유도 죽음을 바라볼 만큼의 이유는 없다. 비논리적, 비이성적 사고.  그런 생각에 매몰되어 삼주 가량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나 자신을 침몰시켜야 했다.  에너지 소모가 큰 만큼  일상을 지킬 에너지가 부족해 힘에 겨웠지만 어떻게든 일상을 지켜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책 한 권을 만났다.






   



     그를 처음 접한 건 신문기사였다. 전사한 전우의 자식들을 위해서 사막마라톤과 턱걸이를 하며 모금활동을 벌여서 도와주는 네이비씰이라는 기사에서. 전우의 찢어진 티셔츠를 입고 달리는 근육질의 흑인 남성이 사진에 있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참에 그가 쓴 책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는 내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은 고통과 실패로 가득 채워진 삶이었다. 가정학대와 불화로 인한 불우했던 어린 시절, 학업부진, 비만, 이혼, 실직 등 그 어느 하나 노멀, 아니  순탄하지도 않던 그가 네이비씰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는 험난한 과정의 기술은  솔직하고 적나라했으며,  어떤 생각으로 그 과정을 지나가고 그를 버티게 했는지 표현한 부분에서  나는 감탄하고 반성했으며 심지어 울기까지 했다.



    


    지금 내가 걸려 넘어지는 생각, 내가 느끼는 절망 같은 것들은 그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니까 그런 거지 , 나와는 다르다로 접근해야 할 책이 아니었다. 내가 그 책에서 받은 메시지는 한 가지였다.  


내가 담을 수 있는
고통그릇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고통으로 만들어지는 마음의 굳은살을 만드는 것. 그래서  내가 걸려 넘어지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만큼  두껍고 넓게 굳은살을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책을 읽기 전까지 마음의 크기를 키우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삶이라는  산의 높이를 처음부터  잘못 보고, 산 중턱에서 이산을 어떻게 넘지 라며 한숨 쉬고 있었을 뿐이다. 애초에 삶이라는 산의 높이를 높게 잡았어야 했다. 이 정도의 높이는 예상하고 어려운 일이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산을 올랐어야 했다. 왜 내 삶만 이럴까 라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걸려 넘어졌다.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자세를 , 시선을 다르게 가져야 했다.  


책에서 나온 구절처럼
고통에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했다.



  

    생각이 바뀌자 그에 따라서 메커니즘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삶의 고통, 힘듦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것이 오는 냐가 아닌, 내 앞으로 다가올 좋은 것들에 대한 치러야 할 대가를 미리 치른다 라는  생각이 드니, 이 고통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고통을 이겨내면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다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내가 이미 받을 예정인 것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이 드니 고통에 대해서 오히려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임할 마음이 들었다. 얼마든지, 힘듦을 이겨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이렇게 한번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내가 가진 고민들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실직으로 인해서 내가 겪은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 굶어서 배고픔을 느낀 적도 없고, 아프거나 덥고 추위를 느낀 적도 없다. 여전히 아이는  어느 한 곳 아픈 곳 없이 신나게 잘 크고 있으며 남편이 겪는 고통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전혀 아픈 곳이 없고 카드값이 연체되거나 식료품을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결국, 내가 느끼던 고통과 고민은 내가 비논리적 사고로 만들어진 허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진짜 고통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허상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몰되고 있었던, 추락하던 나에게 날개가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허상을 벗고 제대로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진짜 고민과 고통, 절망감, 그리고 죽고 싶을 만큼의 괴로움 속에 있을 때에는 이런 생각을 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기억해낼 것이다. 잊었다면 다시 책을 읽으면서 나를 다잡을 것이다. 나는 아직 고통 때문에 생리현상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나의 힘듦이건 고통이건 그 어떤 것이든 내가 정의하는 대로 그 크기가 정해진 다는 것을 상기하며 그 산을 힘차게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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