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veyouth Sep 13. 2020

나도 무시하고 싶다 '대박 구성 핫딜'

어느 맥시멀리스트의 변

지긋이 평범했던 주말 아침, 그날은 왜 그렇게도 빨리 눈이 떠지던지 곤히 자는 남편을 뒤로하고 1층으로 내려와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채널은 전날 내가 보던 홈쇼핑. TV를 켜자마자 "역대 최고 구성" "최저가"를 알리는 쇼호스트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으레 귀를 기울였다. 그날의 아이템은 그릇, 심지어, 하필 내가 쓰는 그릇이었다. 둘이 사는 주제에 6인조 그릇 세트 구성에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진짜 싼가?' 핸드폰을 손에 쥐고 합리적인 쇼핑을 하는 냥 검색에 들어갔다. 이 포털, 저 포털 다 검색해보았더니 말 그대로 이번엔 '찐'이었다. '진짜 싸네' 끝내 절제력을 상실한 나는 대박 구성 핫딜의 기회를 덜컥 잡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잘 자고 있는 남편의 눈치가 괜스레 보여 결제는 12개월 할부로 했다.  


이사를 계획한 뒤 정말이지 웬만해선 구매 행위를 하지 않았던 나의 무모한 일탈이었다. 고백컨데 나는 언제나 미니멀리스트를 꿈꾸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 맥시멀리스트다. 항상 '만일'을 핑계로 구매를 행하고, 웬만해선 집에 없는 게 없다. 그날도 이놈의 '만일'이 쇼핑의 이유였다. 쓰던 그릇이 깨질 수 있는 데다가, 정말 다시는 이 구성을 볼 수 없을 수 있으며, 집들이라도 할 때 그릇이 부족할 수 있으므로 등등 온갖 핑계를 앞세워 집에 잘 있는 그릇들은 살포시 무시하고 주문을 '고고' 했다. 룰루랄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리 없는 남편은 뒤늦게 잠에서 깨 거실로 내려왔고, 유난히 기분 좋아 보이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혼 4년 차, 이제는 평소와 다른 요상한 눈빛만 보아도 무엇인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아는 남편은 "그 표정은 뭐야? 또 뭐 샀지?"라고 나의 정곡을 찔렀다. 남편 몰래 무엇인가를 사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남편 말에 의하면 너무 당당해서 황당한 솔직함을 지닌 나는 "응. 그릇 샀어. 40개"라고 대답했다.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약 1.5초가량의 짧은 시간. 나는 아닌 척했지만 마른침을 삼켰다.


이쁜 그릇에 먹으면 기부니가 조크든여


사실 이사 계획 전 남편은 내가 무엇을 사던지, 얼마를 쓰던지 크게 내 소비 생활에 관여하지 않았다. 천안에서 서울로 나름 열심히 돈을 벌러 다니는 나의 노고를 인정해 주었고, 오히려 매일 오다시피 하는 택배를 보며 '오늘은 또 뭘 샀나'라고 다정하게  물어 나를 여러 번 찡하게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우린 또 한 번의 억대 빚을 지기 위해 서류들을 준비 중이며, 돈을 아껴 쓰기 위해 나름 계획 하에 가계를 운영 중이다. 그런데 또 이 철없는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남편은 '얼마에 샀냐'는 전례 없는 질문을 나에게 하기에 이르렀고, 차마 금액을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 없는 강아지들만 하염없이 쓰다듬어 댔다. 결국 남편은 내 핸드폰을 손에 쥐고 직접 결제 내역을 확인했다.


"59만 6천 원?!!!!!"

"오빠 그거 12개월 할부야. 내가 용돈에서 다 낼게. 심지어 10%는 포인트로 줘서 53만 원이야"

남편은 철없이 신난 나를 보며 황당한 듯 웃었다.

"미래의 너가 갚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남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네? 왜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거지? 주문한 그릇에 신난 마음은 일순간 죄책감으로 변했다.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 년에 한 번은 꼭 큰 금액을 12개월 할부로 결제했다. 그리곤 그걸 없애 나가면서 그게 내가 일하러 다니는 이유라고 여겼다. 할부가 아니었다면 내 손에 들어올 수 없었던 물건과 점점 작아지는 금액을 보며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이런 습관 덕에 무이자 할부를 가능한 많이 해주는 홈쇼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내 덕에 덩달아 홈쇼핑 방송을 자주 보게 된 남편은 '저게 다 할부의 덫'이라고 가끔 꼬집었고, 그 덫에 빠졌다면 빠진 나는 동의도 미동의도 할 수 없어 흐흐흐 웃으며 상황을 넘겼다. 속으론 '난 다 낼 수 있거든'이라는 마음으로.


남편의 친절에 소비 패턴까지 되돌아본 나는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이날의 주문을 취소했다. 마음이 가벼웠다. 사실 거의 처음 느껴 본 이 기분은 언제나 홀로 꿈꾸는 미니멀리스트의 첫걸음일지도 몰랐다. 이제 진짜 새로운 집에 가면 대박 구성 핫딜은 가뿐히 무시할 수 있는 미니멀리스트가 돼야지. (그런데 잘 안 될 것 같아 오빠.... 진짜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참 싫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