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핌픽과 더위에 관한 뉴스로 세상이 채워졌던 여름날, S가 죽었다. 소식을 전하던 수화기 너머의 경찰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 사람들에게 그건 일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지 그 소식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은 덤덤했던 거 같다.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게 더 적확할 거 같다. 그걸 전한 이의 목소리가 건조해서일까. ’진짜? 정말로?‘라는 생각만 머리에 맴돌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S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해서일까.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금방 저기서 나타날 것만 같았다. 현실적인 조건이 S의 죽음에 대한 체감을 막아버렸다. 끝내 마지막 모습도 못 보았고 그 이후 모든 절차도 함께하지 못한 채 보내주고 말았다. S의 죽음은 그날 지역 뉴스에 어설픈 그림과 함께 단신으로 처리되었다. 이게 뉴스라니, 남은 이들은 어찌하라고. 현실은 냉정한 거구나. 종종 S의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바로 죽었을까 아니면 천천히 죽었을까, 나는 죽은 것도 모르고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왜 꿈에도 나타나지 않은 거지? S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 모두의 삶은 바뀌었을까? 하는 식으로. 그렇게 S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느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영화 속 조반니도 안드레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맞이한다. 그는 정신과 의사이니, 그의 상태와 그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첫 장면의 대사처럼만 행동하면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했던 조언을 자신에게 돌려주지 못한다. 슬픔과 고통은 온전히 그의 것이므로 타인(책에서 배운 거니까!)의 경우(와 조언)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조반니가 후회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다는 것을 그려낸다. 타인을 치유하는 삶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모순된 순간들. 그는 이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고 내가 거기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후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잔인하게도 세상은 그의 아픔에 상관없이 멀쩡하기만 하다. 안드레가 놀이공원에 간 모습을 포착한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세상은 무심하고 시간은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후회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안드레의 빈자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영화에서 가장 공감되는 장면은 조반니가 그날 거기에 와 달라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안드레와 조깅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건 조반니의 후회를 그리는데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에는 깊은 후회에 빠져본 이들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숨어 있다고 본다(위의 두 문장을 확정해서 말할 자신이 없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이게 그걸 좀 설명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 슬픔은 나쁜 생물처럼 움직인다. 해일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생활의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불현듯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 슬픔은 고귀하거나 순수하지 않고, 이기적이며 불규칙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깊은 슬픔은 그렇게 움직인다."
프로이트는 상실에 대한 슬픔과 남은 이들이 그걸 어떻게 극복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설명한 바 있다. 이 영화는 바로 그것, 이른바 애도작업으로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리뷰는 도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저 그렇고 그런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복하기 싫은 상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불쑥 들어오는 슬픔의 순간들이 있고 그럴 땐 진심으로 슬퍼하면 되지 않을까(프로이트의 애도작업에 이 의미까지 포함되던가? 근데 괜히 미세하게 결이 다르다고 우기고 싶다). 위의 문장에는 슬픔 그 이상의 이상한 공감대가 있고, 이 리뷰가 그걸 아는 걸까,라고 멋대로 상상해 본다. 슬픔은, 정말 불현듯 고개를 내민다. 나는 저런 문장을 (경험 없이 또는 경험 없이도) 쓸 수 있을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