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보>(제이 로치, 2015)
영화 <트럼보>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라 13년 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천재 시나리오 작가 제임스 달튼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자 미 의회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를 조직해 공산당에 협조한 영화인들의 색출에 나서게 된다. 이전부터 공산당과 연대해 영화계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힘써온 트럼보는 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 소환되어 공산당에 협조한 동료들에 대해 증언하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트럼보가 수정헌법 1조에 의거해 이 증언을 거부하자 영화 산업계는 트럼보와 의회 증언을 거부한 다른 9명을 ‘할리우드 10’으로 명명한 다음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트럼보>는 달튼 트럼보라는 개인의 미시사를 통해 냉전시대 할리우드의 풍경을 조망한다. 천재 작가로 불렸던 그의 위상과 영향력이 서서히 옥죄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시대에 맞선 영웅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트럼보를 영웅으로 그려내지 않을뿐더러 그런 묘사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그 시간을 함께 관통해야만 했던 가족들과 가족의 생계 위해 닥치는 대로 작품 활동을 해야만 했던 그의 모습에 주목한다. 영화는 냉전시대의 풍경과 조국과 대의라는 명분 아래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선 영화동맹의 사람들의 모습에도 한쪽을 내어주며 그 거대 흐름 아래에서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던 트럼보와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자신의 다른 한쪽을 내어준다. 영화의 이러한 태도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다”라는 트럼보의 대사로 정점을 찍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그가 시대를 견디게 한 토대와 빛났던 그의 재능을 부각한다. 영화의 중반을 채우고 있는 B급 영화 전문인 킹 브라더스와의 협업 장면은 사상 투쟁의 현장이라기보다 육체노동의 현장에 가까운 모습으로, 매카시즘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광풍을 그가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트럼보>의 이러한 묘사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커크 더글라스와 오토 프레민저의 선택을 받는 장면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 준다. 그는 외골수처럼 자신의 소신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소신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환경과 자신의 노동력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모든 조건과 환경을 가볍게 뛰어넘었던 천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동시에 영화는 트럼보가 자신의 토대와 능력 그리고 시대를 견뎌낸 과정에서 필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가족과 동료의 희생을 깨닫는 모습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트럼보가 어두운 시대를 견뎌낼 수 있었던 동력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