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크 May 13. 2019

<파업전야>

<파업전야>, 장산곶매, 1989. (2019 05 01 국내개봉)



변하지 않은 세상, 여전히 유효한 <파업전야>


영화창작 집단인 장산곶매가 1990년에 제작한 16mm 영화 <파업전야>가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2019년 5월 1일, 약 30년 만에 정식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후반 국제적인 호황을 맞아 성장한 금속산업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이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국내 최초로 노동현장과 노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장산곶매는 당대 노동자의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경인지역 금속 노동자들을 9개월 동안 취재하면서 시나리오를 작성했으며, 정상조업재개투쟁 중인 인천의 한독금속 사업장에서 노조의 도움을 받아 합숙을 해 가며 영화를 완성하게 된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파업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이 영화에 상영금지 처분을 내리자 연극을 하던 소극장과 대학 강당을 중심으로 게릴라 식으로 상영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최루탄으로 무장한 전경과 헬기 등을 동원해 대학가를 침탈, 상영 중인 필름과 영사기를 압수하고 학생들을 연행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된 상영투쟁은 추산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여 한국 독립영화에 새로운 기록과 기억을 남기게 되었다. 이처럼 <파업전야>는 80년대 후반 노동자 대투쟁의 초상을 프레임 안과 밖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울림은 제작과 상영과정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현장과 계급의 현실

<파업전야>는 87년 가을이라는 자막과 함께 회사 관리자들이 “동성금속 노동자 여러분, 우리가 노예입니까 아니면 기계입니까?”라고 외치는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끌고 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그가 끌려 나가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밥을 먹고 있는 동료 노동자들의 모습을 롱쇼트로 보여준다. 이어지는 것은 88년 겨울이라는 자막과 함께 동성금속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조회를 주관하고 있는 반장(황진)의 모습이다. 영화의 이러한 연결은 1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장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들에게 반말로 작업을 지시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위험해 보인다. 그 와중에 회사의 관리자들은 80년대에 맞는 획기적인 노무관리가 필요하다며 몇몇 노동자들을 회유해 구사대(求社隊)를 조직한다. 영화 초반부의 카메라는 세 계급의 모습, 그러니까 노동자와 중간관리자, 관리자가 노동 현실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관심을 둔다. 

잔업과 철야, 중간관리자의 비인간적인 대우가 계속되자 노동자들은 노조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것을 선동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파업전야>의 미덕은 감각적인 쇼트나 편집, 배경음악을 동원해 현실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수식하지 않는 데 있다. 대신 영화는 그들이 착취의 현실과 연대의 힘을 깨닫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들은 식사시간까지 일하라는 작업장 반장의 강압적인 지시에 크게 저항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배우지 못해서, 반장도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며, 돈을 모으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애써 위안한다. 카메라는 이들의 무기력한 모습 위로 “세상이 그런 거지”라는 대사를 배치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월급날 장면에서는 잔업을 명령하는 반장의 명령에 뭉쳐서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이 잔업을 거부하고 퇴근을 요구하자 관리자인 전무는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노조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연대해서 작게나마 승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들은 허름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우리가 뭉치면 된다는 사실에 고취되어 노조결성을 다짐한다. 

이처럼 <파업전야>는 노동현실에 대한 풍경과 그 현실을 각성해 나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에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잔업철회라는 작은 성공의 경험을 안고 주위 동료들을 설득해 노조를 구성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파업전야>는 이들의 노력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는 이 플롯의 갈등축으로 한수(김동범)를 배치해 노동자들의 현실적인 굴레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가난을 벗어버리고 애인과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수는 회사의 잔업 지시를 무조건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험해 보이는 기계들을 아슬아슬하게 다루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쇳덩이로 가득 찬 노동자들의 작업장은 낭만과 현실이 공존하는 곳이다. 영화는 관객을 고무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리얼리즘적인 욕망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파업전야>는 이 두 가지 욕망의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카메라가 관객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식이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거대 사상에 기대지 않고 노동현장과 등장인물의 현실적 상황을 묘사하는 범위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수는 반장을 시켜준다는 중간관리자의 말에 동료들의 노력을 외면해 버린다. 회사 측은 깡패들을 고용해 위장취업자였던 완익(임영구)을 폭력적으로 해고하고 노조결성의 움직임을 “빨갱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한수를 포함해 회사 측에 협조적이었던 이들을 중심으로 봉사단이란 이름의 구사대를 출범시켜 노동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회사의 방해공작과 노동자들 간에 반목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원기(고동업)를 중심으로 민주노조 결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정부는 노동조합 신고를 거부하고, 회사는 노조에 가입한 이들을 해고한 것이다.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던 동료들을 막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한수는 “열심히 살려고 했던 것뿐인데 왜 이렇게 되었지”라고 울기 시작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 혹은 조건

사실 이 부분은 <파업전야>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으로, <파업전야>의 한계점으로 지적된 곳이다. 인물의 갈등구조가 관습적이고 할리우드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보적 가치를 가리키며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영화지만 그 형식이 보수적이기 때문에 결국 보수적인 영화밖에 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점은 단순하게 풀어낼 수 없는 지점이 숨어 있다. 최초로 노동현장을 재현한 <파업전야>가 노동자들이 왜 노조를 결성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만 하는 위치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수가 느끼는 현실적인 고민은 비단 노동현장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현장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지점이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하는 부분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 노동의 재현에 관한 것이다. 8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배경과 금속노조라는 공간배경은 영화의 카메라가 남성 노동자들로 가득 찬 모습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요소이다. 하지만 <파업전야>는 한수의 애인인 미자(최경희)가 자신의 작업장에서 투쟁에 나서는 모습과 동성금속의 다른 작업장 노동자인 숙희(이은희)가 노조를 조직하는 과정을 서사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설정해 투쟁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처한 열악한 환경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는다. 비록 이 부분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많지 않지만 노동운동의 현장 속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재현한 것은 높이 살만한 지점이다. 영화 속에서 여성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역설하던 숙희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여성혐오적인 언어를 입에 달고 있던 해병대 출신의 재필(홍석연)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재필의 변화와 여성 노동자에 대한 현실을 고발하는 숙희의 목소리, 미자가 역설하는 노동자 연대의 필요성은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은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이들이 사업장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다. 이들이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는 동안 다른 노동자들은 못 본 척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작업에 열중한다. 급기야 회사 측은 깡패들을 고용해 사무실을 점거한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는 비교적 긴 시간을 할애해 5명에 불과했던 이들이 진압당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을 바라보던 한수는 자신의 기계를 멈춰버린다. 그런 다음 이어진 것은 한수를 따라 말없이 자신의 기계를 멈추는 동료들의 모습이다. 그런 다음 이들은 손에 저마다의 공구를 들고 작업장 밖으로 나서는데 영화는 이것을 프리즈 프레임으로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이들의 운명을 관객의 상상 속으로 던져 버리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구경만 해왔던 우리 관객을 향한 참여적 요구인 것이기도 하다. 


2019 05 09  publish by KHUWB

keyword
작가의 이전글 <Trumb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