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브룩의 '빈 공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터 브룩 / '빈 공간'의 시작 부분
연극 전공자들이 안 읽었어도 읽은 척해야 하는 책 중 하나인 피터 브룩의 빈 공간. 전공자인 나도 학교를 다닐 때는 읽은 척만 하다가 졸업할 때쯤 한 번 읽었고 다시 까맣게 잊고 살다가 얼마 전에 다시 한번 읽어보려고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 책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저 두 문장과 다시 만났다. 사실 저 두 문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다.
대학 때 연극을 했다. 자연스럽게 무대도 관객도 없이 비어있는 극장에 들어갈 기회가 많았다. 당시 극장의 이름이 '블랙박스'였는데 말 그대로 까만 상자 같은 공간이었다. 까만 극장에 객석 정도만 깔려있고 그 위에 누워서 가만히 있으면 왠지 무(無) 속에 들어온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많은 무대와 작품이 극장을 채웠지만 언제나 극장은 결국 다시 텅 빈 블랙박스가 되었다.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이자 완전히 닫힌 공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엔 삶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빈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어떤 인물이 등장하거나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부터 극장 안에는 전에 없었던 것이 존재하는 마법이 시작된다.
극장은 무덤에서부터 우주까지, 사무실에서 화장터까지 그 어떤 공간이든 될 수 있다. 산 자에서 죽은 자까지 인간에서 괴물,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인물이 들어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한 배우가 등장해서 "나는 머그컵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그 배우는 머그컵이 된다. 아니, 적어도 ‘저 인간은 왜 자기가 머그컵이라는 거지?’ 라는 의문을 부른다. 머그컵이 혹은 머그컵이라고 말하는 인간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그 공간은 대체 어디인지 풀어가는 게 그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영화나 영상 작업물은 사전에 환경을 세팅하고 그걸 찍는 방식이지만 연극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하는 작업이다. 만들어야 하는 세계가 주방이든 우주든 사랑이든 증오든 선택의 순간이든.. 그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제삼자인 관객을 그 세계 속으로 초대할 수 있어야 하며 자발적으로 의심을 멈추고 그 세계 안에 공존하게 해야 한다. 관객이야말로 그날 공연의 핵심 요소기 때문이다. 만약 위의 그 머그컵 배우가 나올 때마다 어떤 관객이 "사람이 어떻게 머그컵이 돼? 뭐라는 거야."라고 객석에서 중얼거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관객이 객석의 대부분을 메우고 있다면 그날의 공연은 실패일 거다. 연극에서 마지막으로 공연을 완성하는 건 결국 관객이니까.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일이다.
연극의 속성 때문에 사람들은 '연극한다'는 말을 '거짓'과 연관 지어 비하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정말 동의가 안 된다. 연극은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이니까.
만약 극의 배경이 우주라고 하자. 그런데 그 우주 속에 있는 배우가 스스로 여기는 우주가 아니라 극장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한다면 그 공간은 절대로 우주가 될 수 없다. 배우의 테크닉이 정말 뛰어나지 않다면 관객에게 틀림없이 거짓임을 들킨다. 우주로 초대한다고 관객을 불러놓곤 가짜 연극을 보여주는 거다. 영화는 편집이 있고 여러 테이크를 가면서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가지만 연극에서 연출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배우와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며 그 세계가 진실처럼 여겨지도록 함께 답을 찾아나가는 것뿐이다. 같은 장면이라도 많은 이야기와 연습을 거쳐서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는 순간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렵지만 신기한 작업이라고, 삶과 닮아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한 무대에서 누군가의 생이 전부 흘러가듯 상연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연극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100년이 흘러도 이상하지 않은 게 연극 속에서의 시간이다. 극장 안에서의 리얼 타임과 연극 속에서의 시간이 공존해도 이상하지 않다. 빈 공간과 행동, 시선만 존재한다면 극장에선 그 어떤 이야기라도 가능하다.
사람도 하나의 빈 공간을 닮았다.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물과 사건이 생겨나고 지켜보는 시선도 생겨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무언가가 제대로 가로지르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순간들을 막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시간들은 그 하위 단위인 장이 될 거다.
일상에서 '만약'은 하나의 허구지만, 연극에서 '만약'은 실험이다.
일상에서 '만약'은 회피지만, 연극에서는 '만약'이 진실이다.
이 진실이 나의 이야기라고 설득될 때, 연극과 삶은 하나가 된다.
이것은 고원한 목표다. 엄청난 노동처럼 느껴진다.
연극은 고된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노동을 놀이로 받아들일 때, 더는 노동이 아니다.
연극은 놀이다. (A play is play).
피터 브룩 / '빈 공간'의 마지막 부분
그때 빈 극장에 누워있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어떤 인물과 사건이 가로질러 갔을까. 연극이 끝나고 수없이 철거를 하며 영원한 건 없다는 걸 배웠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믿는 것들이 있다. 나의 빈 공간을 누군가 가로지르던 마법 같은 순간, 진실에 도달한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설령 겉보기에 전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처럼 보인다 해도 그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상연되고 있다. 만약, 과 진실, 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을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단, 노동처럼 고되게는 말고.
연극은 놀이다.
삶도 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