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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Mar 12. 2023

빈 공간을 가로지르네

피터 브룩의 '빈 공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터 브룩 / '빈 공간'의 시작 부분  




연극 전공자들이 안 읽었어도 읽은 척해야 하는 책 중 하나인 피터 브룩의 빈 공간. 전공자인 나도 학교를 다닐 때는 읽은 척만 하다가 졸업할 때쯤 한 번 읽었고 다시 까맣게 잊고 살다가 얼마 전에 다시 한번 읽어보려고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 책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저 두 문장과 다시 만났다. 사실 저 두 문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다.


대학 때 연극을 했다. 자연스럽게 무대도 관객도 없이 비어있는 극장에 들어갈 기회가 많았다. 당시 극장의 이름이 '블랙박스'였는데 말 그대로 까만 상자 같은 공간이었다. 까만 극장에 객석 정도만 깔려있고 그 위에 누워서 가만히 있으면 왠지 무(無) 속에 들어온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많은 무대와 작품이 극장을 채웠지만 언제나 극장은 결국 다시 텅 빈 블랙박스가 되었다.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이자 완전히 닫힌 공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엔 삶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빈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어떤 인물이 등장하거나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부터 극장 안에는 전에 없었던 것이 존재하는 마법이 시작된다.


극장은 무덤에서부터 우주까지, 사무실에서 화장터까지 그 어떤 공간이든 될 수 있다. 산 자에서 죽은 자까지 인간에서 괴물,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인물이 들어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한 배우가 등장해서 "나는 머그컵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그 배우는 머그컵이 된다. 아니, 적어도 ‘저 인간은 왜 자기가 머그컵이라는 거지?’ 라는 의문을 부른다. 머그컵이 혹은 머그컵이라고 말하는 인간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그 공간은 대체 어디인지 풀어가는 게 그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영화나 영상 작업물은 사전에 환경을 세팅하고 그걸 찍는 방식이지만 연극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하는 작업이다. 만들어야 하는 세계가 주방이든 우주든 사랑이든 증오든 선택의 순간이든..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끝나는  아니라 제삼자인 관객을  세계 속으로 초대할  있어야 하며 자발적으로 의심을 멈추고  세계 안에 공존하게 해야 한다. 관객이야말로 그날 공연의 핵심 요소기 때문이다. 만약 위의  머그컵 배우가 나올 때마다 어떤 관객이 "사람이 어떻게 머그컵이 ? 뭐라는 거야."라고 객석에서 중얼거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관객이 객석의 대부분을 메우고 있다면 그날의 공연은 실패일 거다. 연극에서 마지막으로 공연을 완성하는  결국 관객이니까.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일이다.


연극의 속성 때문에 사람들은 '연극한다'는 말을 '거짓'과 연관 지어 비하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정말 동의가 안 된다. 연극은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이니까.


만약 극의 배경이 우주라고 하자. 그런데 그 우주 속에 있는 배우가 스스로 여기는 우주가 아니라 극장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한다면 그 공간은 절대로 우주가 될 수 없다. 배우의 테크닉이 정말 뛰어나지 않다면 관객에게 틀림없이 거짓임을 들킨다. 우주로 초대한다고 관객을 불러놓곤 가짜 연극을 보여주는 거다. 영화는 편집이 있고 여러 테이크를 가면서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가지만 연극에서 연출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배우와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며 그 세계가 진실처럼 여겨지도록 함께 답을 찾아나가는 것뿐이다. 같은 장면이라도 많은 이야기와 연습을 거쳐서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는 순간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렵지만 신기한 작업이라고, 삶과 닮아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한 무대에서 누군가의 생이 전부 흘러가듯 상연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연극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100년이 흘러도 이상하지 않은 게 연극 속에서의 시간이다. 극장 안에서의 리얼 타임과 연극 속에서의 시간이 공존해도 이상하지 않다. 빈 공간과 행동, 시선만 존재한다면 극장에선 그 어떤 이야기라도 가능하다.


사람도 하나의 빈 공간을 닮았다.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물과 사건이 생겨나고 지켜보는 시선도 생겨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무언가가 제대로 가로지르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순간들을 막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시간들은 그 하위 단위인 장이 될 거다.


일상에서 '만약'은 하나의 허구지만, 연극에서 '만약'은 실험이다.

일상에서 '만약'은 회피지만, 연극에서는 '만약'이 진실이다.

이 진실이 나의 이야기라고 설득될 때, 연극과 삶은 하나가 된다.

이것은 고원한 목표다. 엄청난 노동처럼 느껴진다.

연극은 고된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노동을 놀이로 받아들일 때, 더는 노동이 아니다.

연극은 놀이다. (A play is play).


피터 브룩 / '빈 공간'의 마지막 부분  


그때 빈 극장에 누워있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어떤 인물과 사건이 가로질러 갔을까. 연극이 끝나고 수없이 철거를 하며 영원한 건 없다는 걸 배웠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믿는 것들이 있다. 나의 빈 공간을 누군가 가로지르던 마법 같은 순간, 진실에 도달한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설령 겉보기에 전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처럼 보인다 해도 그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상연되고 있다. 만약, 과 진실, 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을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단, 노동처럼 고되게는 말고.


연극은 놀이다.

삶도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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