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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Mar 29. 2019

Sausalito, 소살리토

비경제적으로 사는 삶의 즐거움.

 친구와 꿔바로우 하나에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늦은 저녁을 대신하던 중, 친구 옷에 쓰여진 글귀를 읽었다.
 ‘Sausalito’
“소살리토네? 가봤어? 여기 진짜 예쁜데.”
 내 배경화면 속 소살리토의 모습을 친구에게 보여주며 신나 했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지명일 뿐인 이 단어는 내게, 살짝 눈이 감기며 저 멀리 바다 건너 안개에 뒤덮인 샌프란시스코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단어이자 줄 서서 먹던 달콤한 민트아이스크림의 향이 떠오르는 단어, 샌프란시스코 칼바람으로부터 벗어나 햇살을 만끽했던 곳이자 자전거를 타고 떠날 수 있는 곳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뜻을 내포한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늘 한비야 님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외국에서의 삶을 갈망했던 나. 그러나 형편이 넉넉지 못해 친구들이 심심치 않게 다녀오는 외국 한 번, 가까운 제주도도 한 번 다녀오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빨간 가방을 메던, 인기 많은 반 친구의 꿈 ‘외교관’, 그게 비행기를 타는 거라면 그거 나도 되고 싶었고, 가끔 교회에 찾아오는 노란 머리 외국인 선교사, 그게 다른 인종을 만나 친구가 되는 거라면 그거 나도 하고 싶었다. 어린 소녀는 중학교 때 교회에서 친구들이 함께 떠나던 필리핀 봉사여행에도 함께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필리핀에 떠나 있던 기간 내내 학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철없게도 자지러지게 엉엉 울었다. 그 덕에, 할머니의 요양병원 신세로 인해 월급은 물론 모든 빚을 끌어모아 병간호를 하던 엄마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했더랬지. 그 뒤 부모님이 정말 큰 맘먹고 보내주셨던 베이징 수학여행은 세계를 누비며 살고 싶다는 어린 마음에 불을 지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정신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2000원 학식과 밥버거느님을 애식해가며 용돈을 모아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 도움을 받아 떠났던 방글라데시.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과외를 해서 떠났던 대만, 상하이, 러시아, 몽골, 후쿠오카 두 번. 스스로를 ‘역마살’이라 하며 수없이 많은 여정을 계획해 떠나 수없이 많은 사람과 길을 만났고, 그 경험을 토대로 22살 인생,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게 된다.
 ‘내 돈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발 들이기’
 사실 경쟁에 지칠 만큼 지친 탓이기도 했다. 중고등 6년을 서열화된 사회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었더니, 그동안은 좋은 대학에만 가면 된다던 어른들이 이젠 날씬하고 예쁘고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휴, 간신히 상경했더니. 내 주변에는 똑똑하고 예쁜 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들과는 달리 거울 속 내 모습은 평범하다 못해 패배자라는 마음까지 들게 만들었고, 이 사회에서 도피라도 하고 싶었다. 서울에 올라온 엄마와 이태원에 갔다가 조용한 카페에서 코까지 풀면서 엉엉 울며 휴학을 졸랐다. 엄마 나 이제 못살겠다며.

 한국을 뜨리라. 3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휴학을 하고 6개월 동안 주 5일 하루 11시간 220도 불판과 170도 기름 앞에서 열심히 감자튀김과 햄버거를 만들었다. 범생이 외모 덕(?)에 함께 일하는 남동생뻘 고딩들에게 무시를 당하다가도 이웃 가게 이모님들과 친분을 쌓아 즐겁게 지내던 6개월은, 사실 여행 이상의 의미였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것으로 하고, 때로는 주 6일 근무를 하기도 하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아 천만 원 정도를 만들었고, 부모님의 도움도 살짝 받아 2018년 2월, 장장 6개월의 캐나다 어학연수 생활을 시작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새겠냐는 말에 대하여 당장이라도 논문 한 편을 써낼 기세로, 삶의 여유를 찾을 법도 한 1년 휴학 생활 와중에도 내가 속한 밴쿠버의 한 영어학원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더랬다. 마치 곧 수능이라도 칠 사람처럼, 학교 다녀오면 서너 시간은 단어를 외우고, 운동을 하면서도 팟캐스트로 테드와 영어교육방송을 들었다. 구독하던 유튜브 채널도, 좋아하던 먹방 채널도 모두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의 채널로 바꾸었고, 간간이 있는 한국인 채널들은 모두 영어를 알려주는 채널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홈스테이 가족들과 억지로 영어를 섞으며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노력했다. 홈스테이 가족들이 본 동양인의 그 눈은 분명 내 특유의 이글거리는 열심의 눈이었으리라.
 그러던 가운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자 언니, 동기 지수 언니가 샌프란시스코로 여름학기를 지내러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내 멘토와도 같던 언니와의 만남에 일정을 맞춰 바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정말이지 특이한 도시였다. 한 여름에 기모 후드티를 입어도 추운 곳. 7월의 여름에 여기저기서 야구점퍼와 패딩을 팔던 북반구의 도시. 밴쿠버에서 잔뜩 갖고 온 나시들을 무안하게 만들던 곳. 바닷가라 추울 순 있다지만 정말 너무 추웠던 곳. 또 안개는 어찌나 자욱한지, 명물 금문교를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나는 왜 그 특이한 도시가 나와 그토록 비슷해 보였는지.
 사람들은 정말 바빴다. 버스기사는 빨리 달리느라 버스 정류장에 서서 멈춰달라고 손을 흔드는 나를 무려 두 번이나 쌩하고 지나쳤고, 큰 맘먹고 들어갔던 카페 점원의 무심한 ‘thank you, next’는 전혀 고맙지 않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케이블카 탑승로 주변은 소박한 아기자기한 노점상들 대신 forever21, uniqlo, sephora 등 큼직큼직한 기업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건만 내가 본 그곳은 내가 생각하고 꿈꾸던 샌프란시스코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경제학의 원리에 맞춰 가장 효율적이고, 큰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던 곳. 날씨뿐 아니라 마음마저도 참 춥던 곳. 애처롭게도 그곳은 나와 참 많이 닮아있었다. 범생이로 살며 바쁘게, 바쁘게. 초 단위로 단어를 외우고 인강 강사의 암기법을 통째로 욱여넣으며 가장 의미 없는 공부를 하고, 남들이 정답이라는 대로 살고자 노력해왔다. 그 누구보다 효율적인 사회 속 인간이 되어갔지만 그 누구보다 평범해져 갔던 나. 그 속에서 내 진짜 모습, 개성을 잃었던 것이다. 일류 대학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괜찮은 대학교 이름을 얻었고, 꽤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으며, 다이어트도 해서 예뻐’졌’ 다는 소리를 들었고,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최문영이라는 이름 앞에 나는 전혀 성공이 아니었다. 내 주관과 소신을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주어지는 정답과 세상이 옳다고 하는 사실들을 진실인 양 이야기하던 나였다.
 
 샌프란시스코와 스스로가 겹쳐 보이며 말 못 할 낙담을 하던 중,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전거를 타고 금문교를 넘어가면 ‘Sausalito’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다 위에서 자전거라.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이 장장 세 시간 온갖 거센 바람을 뚫고 가야 한다고 겁을 주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밴쿠버에서 하루 서너 시간씩 달리기와 걷기를 병행하며 단련된 몸이었다.

 사실 그 자전거 여행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바람은 머리를 다 헝클어놓아 손빗질도 힘들었으며, 우리 같은 사람들로 인해 다리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다리 위에서 멈춰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생소한 이름의 마을에 대한 기대감은 나로 하여금 그 긴 자전거 여행을 끝까지 완주하게 만들어주었다.

소살리토로 가는 길

 언제 바닷바람이 불었냐는 듯, 다리를 건넌 그곳은 그야말로 7월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만 보던, 흙 언덕과 포장도로. 저 멀리 보이는 가파른 산 등성이에 형성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집성촌과 들꽃들은 세찬 바람과 인파로 지친 내 마음을 달래고 남았다. 다소 가파른 언덕을 자전거로 내려가다가 한 번 굴러 넘어져 무릎과 손바닥의 살갗이 까졌고, 자전거도 망가졌지만 풍경이 정말이지 아름다워 허허실실 웃음만 나왔다.
 도착한 소살리토는 지금껏 가본 수많은 지역과 다른 그만의 감성이 있었다. 프랜차이즈로 가득하지도 않았고, 집집마다 오목조목, 금방이라도 이야기를 들려줄 듯했다.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개가 나와서 인사를 하기도 했고,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찰나였다. 삐쭉삐쭉 고층건물이 가득한 샌프란시스코의 스카이라인이 레고처럼 작게 느껴지며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곳.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효율적이지는 않아도 그 자체로 매력 있고,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곳. 소살리토였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사람. 경제적으로 쓸 만하거나 투자 대비 창출이 크진 않아도 그 자체로 매력 있고,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곳이었다.

 그 이후 밴쿠버에 돌아온 나는 스스로에게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밴쿠버 해안과 골목 카페를 탐방 다니며 구석구석에서 휴식을 취할 기회를 주었다. 지금까지의 인생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그동안 정답이라고 여기던 임용고시 합격이 진정 답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난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친한 친구에게도 수없이 묻던 질문을 스스로에게는 처음 해보았다.
 이제 내가 나와 친구가 된 것이다.
 숨통이 트였다. 달리기만 좋아하던 내가 멈춰 숨 고르기를 하고, 이 달리기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니.
 사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러 다양한 시도들을 하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는 중이고, 이 글쓰기도 그의 일환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남들이 맞다고 하는 것을 기정진실화 하지 않고 내 스스로의 잣대를 대어 내 미래를 결정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끔,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던 소살리토의 풍경이 떠오른다. 반짝이고 아름다웠던, 생각하면 노란 햇살이 떠오르며 민트향이 코끝을 스쳐가는 도시.
 난 그런 작은 마을처럼 이야기가 있고, 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
  

소살리토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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