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하다. 누군가 추천하는 인문고전, 끌리는 제목의 책, 궁금한 책들을 종종 읽긴 하지만 딱히 좋아하는 작가가 없다. 그야말로 마구잡이식으로 책들을 읽는다.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연예인들의 이슈로 대화를 나눌 때도 이런저런 말들을 열심히 떠들어 내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지만, 이상하게도 책 이야기를 나눌 때는 특별한 편식이 없는 편이다. 아주 이상한 줄거리나 문장이 적히지 않은 다음에는 그야말로 무던하게 책을 읽는다. 꾸역꾸역 책을 보다가 내 취향이 아니면 안 보면 그만이다. 사실 이런 점은 세심하게 자기주장을 펼쳐야 하는 독서토론에서나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향은 아니다.
예전 한창 동화 쓰기에 몰두할 때 이런 점을 고민한 적이 많았다. 동화를 꿈꾸는 대부분 작가는 저마다 자신만의 우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사랑해서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에게‘라는 책을 쓴 작가도 있고, 살짝 질문을 던지면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 문체, 스토리를 줄줄 꿰고 있을 만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저 <해리포터> 시리즈에 푹 빠져 있을 때라 조앤 롤링을 좋아한다며 아이돌을 사랑하는 팬처럼 한창 우려먹었다. 사실 조금의 신기함, 호기심 정도였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나는 좋아하는 작가가 없을까?’라는 고민으로 돌아가다 보면 역시, 나이와 성향 핑계를 대거나 열정을 문제 삼게 된다. ‘어쩌면 난 문학이나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생각도 든다. 그냥 글이 좋아서 좋아하는 작가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감싸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나에게도 나만의 우상이 있었다. 바로 헤르만 헤세! 그는 나의 어두운 10대 시절을 비춰주는 커다란 촛불이었다. 혹독한 사춘기를 거치고 있던 나는 ’삶의 의미‘, ’자아 찾기‘에 무척 고민이 많았다. 그런 나에게 <데미안>, <지와 사랑>, <싯다르타>, <수레바퀴 밑에서>, <크눌프> 등등 헤세의 문학은 너무도 매력적인 이정표였다.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를 좋아하는 인도자의 모습, 어둡고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조금씩 본인의 길을 찾아내는 등장인물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물론, 사춘기를 지나고 난 후 점점 헤세와 멀어졌지만 말이다.
이제 50대에 접어든 현재, 또다시 나의 방황은 시작되고 있다. 요즘 들어 다시 헤르만 헤세의 문학이 좋아지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다른 이에게 보이는 나,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나, 그로 인해 마구 흔들리는 균열로 인해 다시금 싱클레어를 찾아서, 골드문트를 바라보며 헤매고 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50대에 접어들어 또다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방황이 시작되고 있다. 헤세의 문학은 안정한 시기에는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특별한 의미를 찾고 싶을 때, 내 안의 중심을 단단하게 붙들고 싶을 때 더 고프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앞으로 난 어디로 향해 가야 할까?
좋은 글을 읽고 싶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잠깐의 호기심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쓰고 싶은 글들을 꾸준히 쓰고 싶다. 이런 마음들이 한낱 어리석은 우직함으로 평가받을지라도, 흔들리지 않게 글 쓰는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