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걷히는 날, 또 다른 고3들의 전쟁터가 시작된다
어스름한 새벽, 창문을 여니 매캐한 겨울 냄새가 스며든다. 며칠 동안 덥고 추운 날씨가 오락가락해도 2024년 겨울은 발걸음을 바삐 하며 우리 곁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나 보다. 11월 둘째 주, 가을의 끝무렵이다.
내일이면 2024년 수능 시험이 실시된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과정에서 고3의 마무리는 항상 수능일과 같이한다. 전국에는 수시를 준비하는 일반고, 정시를 목표로 하는 특목고, 특성화고 등등 다양한 고등학교들이 있다. 내일이 끝나면 각 학교는 계획했던 학사일정에 맞춰 종업식, 졸업식이 시행된다. 1년을 매듭짓는 날짜들이 제각각 다르지만, 고3 시절을 보내온 사람이라면 이제는 수능이 고등학교 과정의 끝이자 시작이 되었음을 짐작한다. 실제로 우리 고3들의 마음은 수능일을 기점으로 이미 학교 울타리에서 저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현재와는 다른 도약을 위해 논술, 면접, 취업을 준비하거나 혹은 또 한 번의 황금빛 기회를 붙잡기 위해 숨 고르기 시간을 갖는다.
일 년의 하루, 수능 날은 시험을 보는 고3과 가족들, 수험생들의 긴장 가득한 싸움터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이미 훌쩍 지난 이들에게 어스름하게 흐릿해진 빛바랜 추억일 뿐이다. 비록 그 한 번의 시험 결과로 현재 삶의 출발선이 그어지고 사회 울타리의 토대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사람이 그날로 다시 돌아가기 싫어 외면하고 싶은 시간이기도 하다. 영국 BBC 방송의 언급처럼, 수능일은 대한민국 전역에 침묵이 짙어지는 날이기도 하지만 망각을 선물하는 날이다.
수능을 앞두고 떠들썩한 언론과 수험생을 둔 주변 지인들의 긴장된 표정들을 접하니 작년, 고3 엄마로서 보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2023년 한 해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수능일이 다가올수록 모든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꾸물꾸물 얄팍하게 올라왔지만,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감정은 오직 아들을 향한 걱정이었다. 이미 모든 주사위를 큰 애에게 던져진 상황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지만, 마치 내가 수능을 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수능 보기 전날 불을 붙인 기다란 양초를 앞에 두고서 온 마음으로 기도했다. 아들이 부디 시험장에서 너무 긴장하지 않기를, 모르는 문제들이 나와도 당황하지 않기를, 시험을 보고 난 아들의 표정이 안 좋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줄 수 있기를. 그렇게 진심을 다한 기도와 마음 챙김으로 수능 날을 보냈다.
꼭 일 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기도 덕분인지, 아니면 운이 좋았는지 아들은 무사히 본인이 원하는 학과에 진학했다. 고3 수험기간 내내 극도의 긴장과 불안으로 마음을 졸이게 했던 아들은 천하태평이 되어 빛나는 갈색 파마머리를 휘날리는 대학 신입생 삶을 즐기고 있다. 수험생 스트레스로 쥐어뜯던 여드름 자국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일주일에 몇 번씩 술을 마셔도 뽀얗게 빛나는 안색을 자랑하는 건강한 청춘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고3 엄마로서 보내는 시간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격랑의 표류 기간이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매달 모의고사 난이도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특히 정치권의 싸움으로 이리저리 뒤집히는 고3 수능 호를 타고 있을 때는 괴로웠고 두려웠다. 제발 그냥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만을 빌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혼자만의 싸움 속에서 버티고 빌었다. 그런 시간이 지속될수록 큰 애와 우리 부부는 서로를 감싸는 전우가 되었고 더욱 마음을 잘 헤아리는 동지가 되었다. 고3 아이와 함께하는 하루하루는 유난히 빨리 지나가는 일 년의 시간 속에서 아들의 삶과 가장 가까워지는 기간이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고3 시간은 다르다. 어떤 이는 어차피 지나가는 인생의 관문이라며 편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이와 함께 긴장된 1년을 보내기도 한다. 다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난 '아이가 고3이지, 엄마는 아니야'라는 말로 우리 아이가 그 힘겨운 싸움을 홀로 견디기를 바라지 않는다. 일생에서 한 번뿐인 시간, 같이 견디고 독려하며 그 기간을 보내고 싶다. 2024년 수능이 끝나는 날, 나는 고3 엄마로 사는 두 번째 삶을 준비해야 한다. 학교 가기 싫어하고 침대에서 핸드폰과 함께 뒹굴뒹굴하기 좋아하는 둘째, 이제 그 녀석의 시간이다. 대한민국 전체 침묵이 걷히는 날, 또 다른 고3들의 전쟁터가 시작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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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수능을 치는 모든 이들에 축복과 행운이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