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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양 Mar 07. 2023

할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편지

엄마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귀경’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어딜 가면 여기저기를 둘레둘레하죠. 농사 일로 바쁠 땐 신발을 신고 벗는 시간이 아까워 맨발로 다닐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을 하신 분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계모임 등에서 단체관광을 갈 때면 빠지지 않고 참가하셨는데 항상 막내아들인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고산 대아리댐, 속리산 문장대, 어딘지 기억나지 않는 바닷가와 섬... 엄마 손을 잡고, 코를 흘리며 졸래졸래 따라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산과 바다로 구경을 다니면서 엄마는 한복으로, 아버지는 양복으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아웃도어 옷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엄마는 한복을 다리면서 저에게도 새 옷을 사서 입혔죠. 다른 친구들은 명절조차도 새 옷을 사 입는 것이 힘든 시절이었는데 저는 단체관광을 따라다니면서도 새 옷까지 입는 복을 누렸습니다.


엄마는 겁이 진짜 많은 사람입니다.


속리산 문장대로 올라가는 높은 철계단이 가파르고 비좁았는데 엄마가 겁이 질렸는지 옴짝달싹조차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는 바람에 오가는 사람들이 난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질까 무서워 엄마 꽁무니에 찰싹 붙어 있었죠.


오늘 오후에 엄마와 함께 짧은 봄 여행, 귀경을 다녔습니다. 어제 여산에 도착해서 나들이를 가자고 했더니 눈에 생기가 살짝 돌면서 “가자, 가자”고 하시더군요. 엄마는 간병인의 부축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고, 걷는 것이 힘들어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철 지난 드라마를 보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사람입니다.


그런 엄마도 봄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여산에 올 때마다 가급적이면 엄마와 함께 드라이브를 다니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로 낭산, 미륵사지, 강경, 논산, 고산 등 가까운 곳으로 다녔지만 멀리는 전주 한옥마을, 부안 바닷가로 다닌 적도 있죠. 오늘은 황등에 들러 점심을 먹고, 금강을 따라 웅포곰개나루, 성당포구를 다녀놨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황등에서만 맛볼 수 있는 비빕밥이 있는 고장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도 엄마와 함께 ‘황등비빕밥’을 먹기 위해 가끔 들렸던 곳이죠. 두 분이 참 맛있게 드셨습니다. 전주비빕밥과 다르게 비벼서 나오고 맑은 선짓국이 국물로 따라 나옵니다. 저는 전주비빕밥보다 맛있게 먹습니다. 경상도 진주비빕밥도 유명한데 황등처럼 비벼서 나옵니다.


엄마가 삼십이 년 생으로 아흔이 넘었지만 정신은 멀쩡하십니다.


식사를 마친 엄마가 “이게 얼매여?”라고 묻더군요. 만 천 원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느릿한 말투로 “셰 그릇잉게 삼만 삼천 원이네”라고 하시면서 바지 안의 속주머니를 끌러 지폐를 꺼내 만 원짜리 석장, 천 원짜리 석장을 건네 주셨습니다. 마다했더니 한사코 돈을 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람도 쐬고, 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셔서 아주 기분이 좋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얻어먹어야 합니다.


금강에도 봄이 왔더군요.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곰개나루를 산책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엄마가 가로수를 보며 무심하게 “꽃 필 때 보면 조컷네”라고 나직하게 내뱉었습니다. 무슨 나무인줄 아냐고 물었더니 “버꽃”이라고 하셨습니다. ‘장님이 앞은 못 봐도 세월 가는 것은 안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아흔이 넘은 엄마를 별 감정이 없는 늙은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뭘 하시겠어, 뭘 느끼시겠어?’라고 무시하는 심리가 깔려있었던 거죠. 엄마를 시답잖은 늙은 사람으로 여겼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더군요.


엄마 앞에서 조심해야겠습니다. 정물화처럼 행동이 없고 말수가 적어졌지만 엄마는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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