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연구위원 말고 연구원입니다
연구원. 이 단어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흰색 가운을 입은 채 셀로판지 같은 고글에 플라스크, 스포이드를 장착한 깔끔한 실험자가 생각날 수도 있다. 혹은 뒤엔 두꺼운 책들이 잔뜩 쌓인 책장을, 눈앞엔 종이 더미가 난잡하게 깔려 있는 책상을 갖춘 거북목의 안경잡이 연구자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 둘 다 맞다. 그 모든 연구자가 모인 곳이 있다. 바로 세종특별자치시 나라키움 세종국책연구단지다.
나라키움 세종국책연구단지
연구단지엔 총 11개의 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 기관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국가과학기술연구회, 한국환경정책평가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교통연구원, 산업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한국직업능력개발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다. 각각 연구지원동과 과학인프라동, 경제정책동, 사회정책동에 나뉘어 입주해있다. 연구단지를 함께 공유하지는 않지만 지근거리에는 한국법제연구원,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국토연구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KDI 국제정책대학원으로 많이 알려진 한국개발연구원도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그야말로 연구마을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연구단지에 방문했던 내 친구는 엄청 큰 마을에 각종 석박사 것들을 한 군데 몰아넣어 가둬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다양한 편의시설도 있다. 연구단지 노동자가 이용할 수 있는 피트니스 센터와 축구장, 테니스장, 구내식당, 어린이집 등이 있다. 적다 보니 무척이나 다양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내과와 정형외과, 약국 하나씩 만이라도 단지 내 입주시켜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단지 밖으로 나가면 있지 않느냐고? 없다.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모든 직장이 그렇듯 많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질병에 시달린다. 나만해도 연구원에 온 뒤로 위장염과 각종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살고 있으니까. 그래도 요즘 단지 근처에 공연장과 서점이 생기고 토끼정, 미즈컨테이너와 같은 ‘서울스러운’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살만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다. 그렇지만 연구단지의 자랑은 역시 배산임수다. 연구단지 바로 앞에 금강이라는 강 하나가 흐르는데 한낮에는 너무 아름답다. 물론 아침엔 눈앞이 새하얗도록 아무것도 안보이긴 하지만!
이러한 단지 내 기관들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이하 정부출연연)이다. 정부출연연이란 정부출연 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과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 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하여 설립된 연구기관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정부가 돈을 내 만든 연구기관이라는 말이다. 정부출연연은 중앙정부가 주도한 기관과 지방정부가 주도한 기관으로 나뉜다. 중앙정부 출연연은 각각 경제인문사회연구회(26개)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25개) 소속으로 나뉘고, 지자체 출연연은 총 27개로 전국 각지에 분포해있다.
이 출연연들은 곧 정책연구소인데, McGann(2012)에 따르면 정책연구소란 ‘정책결정자와 대중이 공공정책에 관해 정보에 근거한 결정을 하도록 국내외 이슈에 대한 정책 지향적 연구, 분석, 조언을 제공하는 공공정책연구기관’으로 정의된다. 쉽게 말해 국가와 국민에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조사·분석·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국가 정책 수립을 돕는 싱크탱크(Think Tank)다.
싱크탱크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다음의 내용은 우리 연구원 기준이라는 것을 밝힌다. 직군은 연구직과 행정직, 전문직으로 나뉜다. 연구직은 그야말로 연구 실무를 담당하는 연구자(석박사)들이고, 행정직은 경영관리 등의 행정실무를 담당(대부분 학사 이상)하고, 전문직은 전문기술을 바탕으로 한 테크니션(대부분 학사)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직 직급체계는 연구원(석사)-전문연구원(석박사)-연구위원(부연구위원-연구위원-선임연구위원/박사)으로 구성된다.
이 체계에서 가장 말단에 있는 연구원들은 대부분 위촉 연구원들이다. 전문연구원과 연구위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정규직이다. 알다시피 위촉이란 계약직이라는 뜻이다. 현 정부의 노동정책에 따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는 케이스가 생기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케이스가 생긴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행운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얼마 없다. 해서 아직 대다수의 연구원들은 위촉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한 학기에 800만원씩 내고 석사학위를 땄다는 동료 연구원은 학비 본전도 뽑기 전에 계약기간이 끝난다고 말한다. 고용안정 따윈 없는 불쌍한 위촉 연구원들은 이 집(연구원) 저 집(연구원)을 전전하면서 ‘들어갈 땐 네 맘대로지만 나올 땐 그렇지 않단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오래된 속담을 거스르는, ‘들어갈 땐 어렵지만 나갈 땐 쉬운’ 그런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지금 나는
세종시에 살고 있다. 그렇게 된지는 두 달이 조금 넘었다. 본가는 서울이다. 물론 두 도시를 오가는 통근버스가 있다. 아침 6시 40분쯤 사당에서 출발해 장장 2시간이 걸리는 버스다. 워낙 엄살이 심한 편인 나는 버스 이용 10회 차도 안 되었을 때부터, 온몸이 찌뿌둥하고 이 세상 과업은 내가 다 떠맡은 것 같은 컨셉이 되었더랬다. 그래서 누구보다 빠르고 남들과는 다르게 자취방을 구했고, 방년 27세에 첫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종시에서 무슨 일을 하냐 묻는다면 말그대로 연구원의 연구원이다. 종종 신문기사나 뉴스 인터뷰에서 볼 수 있는 고귀한 연구위원님(예: 이XX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블라블라"라고 말했다)은 아니고 그들을 보필하는 연구원 신분이다. 연구위원들이 맡는 다양한 연구과제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업무는 크게 자료의 수집 및 분석과 연구 관련 행정처리로 나뉜다. 글자와 숫자로 된 다양한 학술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기도 하고, 텍스트로 된 정보나 숫자로 된 데이터를 분석하기도 하며, 이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집필할 때도 있다. 그리고 연구과제의 플로우에 따라 시작부터 끝까지 관련 행정처리를 하고, 필요한 행사(각종 회의, 포럼 등)를 준비하고 진행한다.
이제부터 연구원 개인으로서의 생존과 생활은 적확히 어떤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 전에는 이 일을 왜 시작했는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봐야겠다.
자. 연구원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