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울려 퍼진 6만 명의 함성
FC서울 경기를 보러 상암에 종종 왔었지만, 국가대표팀 경기는 꽤 오랜만이다. 수원과의 슈퍼매치, 인천과의 경인더비 등 화제성 있는 경기에는 FC서울 관중 수도 2, 3만 명을 넘어가 경기장 앞 광장이 나름 북적북적하다.
그렇지만 대표팀 경기는 비교 불가다. 특히나 3월 26일, 대한민국 vs 콜롬비아 국가대표 친선경기를 보러 6만 4천여 명의 팬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았고 한국 축구는 A매치 최초 6경기 연속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하여 평소보다 일찍 출발을 했을 때만 해도 '너무 일찍 도착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지만 착각이었다. 오후 8시 경기에 앞서 6시쯤 도착했을 땐 이미 경기장 앞 광장은 축구 팬들로 북적북적했다. 얼핏 봐도 K리그의 FC서울 경기와는 비교도 안 되고 이전 대표팀 경기 때 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악마 머리띠와 축구 유니폼을 커플룩으로 착용한 연인들. 부모님 손을 꼭 잡고 따라온 손흥민 유니폼을 입은 사내아이. 아이돌 콘서트를 보러 온 것처럼 들떠있던 황의조, 이승우 담요를 두른 교복 차림의 여학생 무리.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던 운동복 차림의 남학생들. 그리고 상암을 자주 찾을 것 같은 FC서울 유니폼을 입은 팬의 모습.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한 눈망울을 한 다양한 팬이 경기장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축구의 흥행을 꿈꿔왔던 나로서는 이런 장면이 너무 뿌듯했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역시 새로운 팬의 유입이다. 물론, 월드컵 기간에는 전 국민이 열렬한 축구 팬이 된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지 반년이 훌쩍 넘은 이 시기에 대표팀 친선경기가 이런 관심을 받았던 적이 또 있을까.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월드컵에서 세계 1위 독일을 상대로 2-0 승리. 세계 최고 리그 중 하나인 EPL에서 손흥민의 역대급 활약. 베트남에서의 박항서 감독 신드롬. 그리고 이승우가 포함된 U-23 대표팀의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올해 초 아시안컵에서는 주춤했지만 이미 달아오른 한국의 축구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러한 흥행이 이어지다 보니 손흥민, 이승우뿐만 아니라 황의조, 조현우, 김문환 등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선수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들을 보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팬이 경기장을 찾아준 것 같다. 축구협회의 다양한 이벤트, MD상품 기획 및 적극적인 SNS 마케팅도 큰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팬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이날 대표팀은 남미 강호 콜롬비아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뒀다. 비록 많은 팬이 기대했던 한국 최대 유망주 이강인과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소녀팬 마음을 흔들어놨던 백승호의 성인대표팀 데뷔전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상암을 찾아준 팬들을 만족시키기엔 충분했다.
이날 경기장에 있던 6만 4천여 명 중에 축구 직관이 처음이었던 팬도 많았을 거라고 예상한다. 이 분들이 이번 경험을 통해서 집에서 보는 축구와 직접 경기장을 찾아서 보는 축구가 어떻게 다른지 느꼈길 간절히 바란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부터 보이는 빨간 유니폼을 입은 들뜬 팬의 모습. 광장 앞에 입장을 기다리는 시끌시끌한 수천, 수만 명의 모습. 경기장에 관중석 섹션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웅장함과 상쾌한 잔디 내음. TV 중계에선 볼 수 없는 선수들의 경기 전 몸 푸는 모습과 화면을 통해서는 절대 전달될 수 없는 붉은악마의 열정 넘치는 응원소리.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을 돌면서 찾아와 준 팬들에게 인사하는 대표팀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선수들과 그리고 6만 관중과 함께 뛰고 있는 것만 같은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생동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다.
팬들이 부디 소중한 기억만 가지고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사실 아쉬운 점도 많았다. 제대로 된 안내가 없어 어떤 줄인지도 모른 체 수백 명가량이 서있었던 경기장 입장 줄. 입장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게이트, 좌석 등을 찾기 어려워했던 점. 사람이 너무 몰려 도저히 계산을 못할 것만 같던 편의점과 조금만 돌아가니 숨어있던 훨씬 줄이 짧았던 편의점. 경기장 내에서는 편의점 품목으로만 제한됐던 간식거리, 그리고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품절됐던 인기품목. 더럽진 않았지만, 청결하지도 않았던 화장실. 팬들과의 특별한 소통 없이 진행됐던 하프타임 행사.
축구장을 처음 찾은 팬이 이런 아쉬웠던 점을 기억하고 집에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직관을 즐기는 팬이 늘어야 국가대표에게 관심이 한철이 아닌 K리그의 흥행,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축구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많은 분들이 한국 축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축구 생각보다 재밌네?'라는 생각을 가진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팬이 '와, 경기장에 직접 와보니 집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구나'라고 느낄 기회였던 이번 친선경기. 이번 기회에 먼길 와준 축구팬이 혹시나 아쉬운 첫인상을 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되며 이런 사소한 부분들도 한국 축구의 성장을 위해 개선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기존의 30대 남성 팬들 외에 어린아이들과 여성 팬의 직관은 긍정적이다 (*참고로 국내 축구, 야구, 농구, 배구 프로리그 중 축구 여성팬 비율이 제일 낮다). 이렇게 한국 축구가 주목을 받을 때 축구협회, 축구인, 그리고 축구 팬은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소한 개선점부터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며 핑크빛 돋보이는 현재 한국 축구의 인기가 '한철 피었다 시드는 벚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늘 푸른 소나무'와 같길 바란다.
보너스 feat. 이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