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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Jun 11. 2024

네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는 내가 너무 초라해

 갓난아기와의 24시간을 일주일 꼬박 채운 어느 금요일이었다. 명절 연휴를 맞이해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한 남편은 육아에 지친 나에게 근교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낮잠을 못 이뤄서 칭얼거리던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니 금방 잠이 들었다. 앞 좌석에 남편과 나란히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눠 마시며 자주 가던 한적한 바다를 보러 갔다. 뜻밖의 데이트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바다로 향하는 내내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는 남편. 그의 입에서는 명절 보너스, 회식, 팀장 승진, 이직 등등 회사원의 언어가 줄줄이 등장한다. 창밖 풍경에 넋을 놓고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올랐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놀란 남편이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왜 우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오목조목 설명을 늘어놓는다 한들 그는 알까. “네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는 내가 너무 초라해.” 뭐라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 겨우 입을 뗐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금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너무 초라해서 미칠 것 같아. 미처 화장하지 못한 민낯의 피부가 초라하고, 성과급 100만 원이 적다고 볼멘소리 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내가 초라하고, 아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지겨워하는 내가 초라해. 뭐라도 하고 싶고 쓸모를 증명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내가 초라해. 초라하다고 말하는 내가 너무 초라해.      



 내 속에 가득 들어찬 언어(혹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분노)를 손으로 끄집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내 감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언어는 ‘초라하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초라했을까. 갓난아기와 함께라면 화장실을 편히 갈 수 없고, 나 자신을 꾸밀 여력이 없고, 계발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시작한 길인데. 한 번 겪어보았으니 다 알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주친 육아의 세계는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그날 남편이 어떻게 나를 다독여줬는지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손을 잡아줬던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늘어놨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지금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일 하고 있잖아. 그러니 절대 초라하지 않아. 아무나 못하는 일을 잘 해내고 있는 중이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육아의 한가운데 있을 때 힘이 되어주는 단 하나는 바로 ‘인정’이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 “너를 대신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흔하디 흔한 말이 고단한 내 마음을 순식간에 어루어만져 준다. 그의 진심이 나에게 닿자 마자 나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또 나를 다독일 수 있었다. 


만일 남편이 자신의 경제활동이 육아보다 대단하다고 말했더라면, 남들도 다 하는 육아 왜 너만 그렇게 징징거리냐고 비아냥거렸더라면 나는 화병이나 우울증에 걸렸을 것이 틀림없다. 나의 초라함과 분노를 모른 척했더라면 천 번 만 번 되돌릴 수 없는 감정의 길을 건너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물욕보다 인정욕구가 더 강한 인간이라는 걸 육아를 하며 제대로 깨달았다. 회사원이었던 시절을 되돌아보아도 나의 성과를 누군가가 몰라줘도 아무렇지 않은 그저 무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육아를 할 때만큼은 나는 꼬박꼬박 인정받고 위로받고 응원받고 싶다. 누군가가 나의 외로움을 힘듦을 꼭 알아줬으면 좋겠고 위로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힘겨워서 버텨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출산 수고 선물, 육아 수고 선물로 갖고 싶은 명품 가방이 있으면 사줄게라는 남편의 말에는 동요하지 않지만, 홀로 육아를 책임지고 난 후 “수고했어.”라는 한 마디는 꼭 듣고 싶다. 월급도 없고 경력도 안 쳐주는 이 외로운 길에 “인정해 주는 마음” 그것만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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