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 여행기
엄마와의 해외여행은 12살 쿤밍 여행이 마지막이었으니, 15년 만이다
그 사이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이는 스물일곱이 되었고, 서른 후반이었던 엄마는 쉰이 되었다.
나와 유럽여행을 가는 것이 버킷리스트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여행자금을 저축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얘기하니까 유럽 말고 가까운 홍콩이라도 가보고 싶다 하셔서 2주 전에 급 추진된 여행이었다..ㅎ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었던 여행이라,, 또 투머치 토커가 될 듯하다 히히
복잡한 홍콩에서 발견한 여유로움
야우마테이, 침사추이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심지어 야우마테이는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아서 동일한 시간 걸어 다녀도 최대밝기로 한 내 아이폰처럼 에너지가 빨리 방전된다,,
수직적인 볼거리가 많은 홍콩은,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고 도시에 숨겨진 모든 선물을 경험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건물이 위로 길쭉하고 2층 이상에도 정말 많은 볼거리+놀거리가 있는데 간판이 잘 안 보여서 초행길인 사람이 지나가다가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에 치여 힘들어죽겠는데 시간 보낼만한 널찍한 카페도 없어서, 기운이 다 빨린 모녀는 결국 도망치듯이 도심을 벗어난 오션뷰 카페를 가기로 했다. 구글맵에 행선지를 찍고 가는 길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고, 카페에 가기 한참 전부터 탈선하기 시작했다. 근데 화장실을 찾는 길에 이 광경을 발견해 버렸다.
복잡스러운 홍콩에서 발견한 한적함
이곳은 카오룽 아트파크라는 곳이었는데, 현지인들이 캠핑 장비를 들고 와서 많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관광객들의 명당인 침사추이 산책로와 다르게 동네주민 비율이 압도적인 공원이었다.
뷰와 바이브가 너무 만족스러워서, 바위에 냅다 드러누워서 책 잠깐 읽다가, 엄마랑 홍콩을 기억하기 위한 노래를 같이 들었다.
적당히 누워있다가 산책을 잠깐 했는데 내 눈에 담긴 모든 풍경이 평화로웠다. 비눗방울 부는 아이, 가방 안에 얌전히 있던 강아지, 혼자 와서 하버뷰를 보며 맥주 한 캔을 마시던 여성분, 텐트를 정리하다가 불어온 강풍에 홀라당 날아갈 뻔했는데 앉은자리에서 한 손으로 턱 잡아준 아저씨 (진기명기 바이브) 등등ㅎ
암튼 이곳은 짧굵홍콩 여행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비 온 뒤 마주한 따스한 햇살 같은 현지인들
마지막날은 출국 시간 전까지 여유가 없어서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움직여야 했다.
숙소 근처라 10분가량 걸었는데 부슬비가 갑자기 장대비가 되더니 신발과 양말이 폭삭 젖기 시작했다.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탓에 택시를 잡기도 애매해서 그냥 마저 걸었다.
다행히 장대비에도 노상 식당은 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문 닫았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너무나도 감사했다. 회사원, 주부, 학생들 다양한 페르소나의 사람들이 아침 8시부터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와 아침을 시켜 먹고 있었는데 이들의 문화에 잠깐 젖어든 느낌이었다.
처리해야 하는 과업의 무게감이 없이 순전히 순간을 즐기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비를 막아주는 파라솔 아래에서 비를 마주하며 먹는 음식은 부채감 없이 행복했다.
다음 끼니는 완탕면이었는데 너무 빨리 움직인 바람에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결국 문 연 딤섬집을 찾아갔는데 이게 웬걸 미슐랭 원스타에 관광객이 한 명도 없는 전통적인 방식 그 자체의 딤섬집이었다.
유튜브로 여러 번 본 적 있는 방식이었으나, 생소한 주문 방식이라 굳이 일정에 포함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직원분은 한 손님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홍콩은 좁은 땅에 인구밀도가 높은 탓에 식당 역시도 합석 문화가 흔한데, 이틀간 여행하며 한 번도 합석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모르는 이와 함께 내 arm reach 정도의 둘레를 가진 좁은 원형식탁에 같이 앉았다.
손님은 음식을 다 먹은 듯했고, 우리가 쩔쩔맨 듯 보이자 외국인인지 확인하시고 이 생소한 모든 프로세스를 하나하나 알려주시기 시작했다. 1) 첫 번째로 우러난 차로 잔을 씻는 것부터, 2) 카트가 오면 무엇이 들었는지 설명해 주신 후 먹고 싶은 것을 달라고 하고, 3) 식탁과 유리판 사이에 끼워둔 영수증을 꺼내 전달하면 직원분이 해당되는 메뉴를 도장 찍어줄 거고, 4) 딤섬 종류에 따라 금액이 달라서 다 먹고 이 영수증을 저쪽에 가져가서 계산하면 된다고.
그냥 떠나도 되는데, 그분은 모녀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신 후 우리가 한입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까지 보고 나서야 짐을 싸고 나가셨다. 여행에서 마주하는 친절함은 너무 고맙지만 동시에 다시 되갚을 수 없다는 상황 때문에 죄송스럽기도 하다.
그럴 땐 선배의 내리사랑처럼, 내가 받은 친절을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어도 되겠다 싶었다. 한 사람의 친절은 생각보다 파급력이 크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것이다
이젠 딤섬집에서 느낀 두 번째 감상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메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과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카트에 어떤 것이 담겨있는지 모른 채 기다리는 방식은 천지차이였다.
새로운 카트가 올 때마다 창펀이 들어있는지, 디저트가 있는지, 샤오마이가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저 이들이 가까워졌을 때 찜기를 하나하나 열어달라고 한 뒤에 고를 수 있다.
직접 열어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운이 좋아 취향에 맞는 것이 있다면 바로 먹을 수 있지만 연이어 오는 카트에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면 다음 기회가 오기까지, 더 정확히 말하면 다음 카트에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가 담겨있기를 바라며 계속 계속 기다려야 한다.
말만 들으면, 되게 답답한 방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자리에서의 나는 정반대를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참지 못했을 기다림의 시간이, 지금 오는 카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며 선물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설렘으로 가득 찼었다.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났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도 같아서, 열어보기 전까지는 어떤 초콜릿이 있을지 모르지만, 열어본다면 분명 달콤함을 경험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 명대사의 요지는 다른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초콜릿 상자에는 무조건 초콜릿이 들어있지만 그것이 인생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이라는 상자에 초콜릿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래야 모든 인고와 기다림의 시간이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정확히 어떤 것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떤 것이든 담겨 있을 카트를 보며, 내 인생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끝은 달콤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지금의 내 마음의 상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같았다.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아직 오지 않은 결과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중한 책임감으로 힘들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기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공항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며 여행에 대해 회고하는 시간이 있었다. 엄마는 여행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며, 먹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고 입맛이 비슷해서 같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좋았고, 특히 내가 알아서 다 해줘서 더 편하게 다녔다고 했다.
나는 후자에 대해 솔직한 마음으로 친구와 여행할 때만큼 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엄마는 출장을 제외하면 15년 만에 제대로 된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라, 나에게는 모종의 책임감이 있었다고. 엄마가 이 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지 신경 쓰느라 힘들기도 하고, 일정 및 이동 모든 것을 다 신경 쓰느라 피곤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엄마와의 여행을 나의 ”희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다음 여행도, 다다음 여행도 온전히 즐기려면 내가 희생해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상을 솔직하게 밝히며, 이번엔 처음이라 내가 많이 책임졌지만 다음엔 엄마도 조금씩 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번에 구글 맵 사용법과 트리플 앱을 익혔던 것처럼 익숙하지 않을 뿐 막상 해보면 어려운 건 없다고. 내가 모든 걸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엄마와도 여행 준비의 부담을 나눌 거라고 선포했다.
엄마도 동의했고, 이번 여행에 대한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젠 정기적으로 해외여행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전엔 아빠와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싸워서 여행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 아예 달라졌다고 했다.
다음 여행을 기약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었으니 다음부턴 나도 나의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함께 일을 나눠지기로 했다.
(효녀가 되기 위한 불효라고 생각한다ㅎㅎ)
이후에도 간간히 엄마와의 여행기를 올릴 수 있기를! 아디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