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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Nov 02. 2021

서른세 살 여자 백수

고등학교에 다시 가는 꿈을 꾸다

 얼마 전 고등학교에 다시 가는 꿈을 꾸었다.


 드라마나 만화 속에서 볼 법한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을 과거로 가져가 고등학교에서 우등생이 되는 꿈이 아니라, 수업 일수를 아슬아슬하게 채우지 못해 고등학교 3학년을 1년 더 다니게 되는 끔찍한 꿈이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은 참 오랜만이었다. 나를 말렸던 현명한 어른들이 아니었다면 사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사실이 아니라 꿈이어서 너무도 다행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겨울, 아버지는 암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남은 건 병원 치료로 남은 빚더미와 어린 두 딸뿐이었던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오셨다.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어머니가 딸들과 먹고살아보고자 내린 결정이었으나 나름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열심히 학교에 다니던 나는 원래 살던 동네보다 좋지 않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이 가득했다.


새로 전학을 온 학교는 수학 경시대회 수상자가 수두룩하던 전 학교와는 달리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시골 촌에 있는 학교들처럼 수업이 끝나면 개울물에서 친구들과 놀고 자연과 가까운 분위기였다.




 나는 사춘기시절 친구에게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 나약한 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나의 가장 친한 단짝이었던 친구는 그때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어려운 형편에서 자란 아이였다. 부모님의 구속이 전혀 없던 친구는 나에게 급식비를 몰래 빼돌려서 옷을 사러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결석을 해본 적 없던 나에게 (아버지는 아파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학교와 학원을 한 번 빠져도 당장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학생은 학교에 가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하지만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편하게 놀기만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달콤했다. 사실 공부란 해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것뿐이지 마음속으로는 하기 싫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중학생의 나는 내 눈앞에 놓인 과제들을 하나, 둘 피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우리를 학교에 보내고도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을 하셨고, 어떤 누군가가 내 숙제와 공부를 챙겨줄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 자유롭게 놀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냥 놀기만 하고 연애만 하던 내 단짝친구와는 다르게 나는 중학교 2학년까지는 공부하는 다른 친구를 따라 시험기간에 공부도 하고 성적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 시험은 대체로 까다롭지 않아 벼락치기만 해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온다는 것을 알리가 없었던 나는 내가 머리가 좋은 줄로만 알았고, 꼭 다른 친구들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성적이 잘 나온다고 굳게 믿었다.




 3학년이 되어 더욱 방황하던 친구는 실업계 고등학교 중에서도 가장 좋지 않았던 시골의 여자 상고에 진학했고, 어렴풋이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내내 선행학습도 하고 열심히 해왔던 친구들과는 달리 안일한 마음으로 입학한 나는 좌절에 빠졌다.


 첫 중간고사에서 70점대 점수를 받고 도망칠 곳을 알아보던 나는 입시미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입시 미술 학원에서 달콤한 말로 나를 꾀었는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그렇게 들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미술을 하면 밤 10시까지 남아서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며, 그림 실력이 된다면 성적은 중간만 되어도 꽤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수학을 보지 않는 학교가 많아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어린 시절 형편이 안되어 미술학원에 몇 달 보내주시지 못해서 내심 미안해하셨던 어머니께서는 딸의 꿈을 기꺼이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공부가 하기 싫어 미술을 시작했는데 그림 그리는 것은 만만할 리가 없었다. 1년 동안 그림을 그렸음에도 마지막 입시 문을 뚫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린다는 학원 스케줄과 3배가 된 학원비를 보고 나는 학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수능이 3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미술만 믿고 공부도 전혀 하지 않았던 나는 수시로 바로 갈 수 있는 전문대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내가 학원에서 꽤나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인지 무뚝뚝하던 학원 담임 선생님께서는 책임지고 인 서울 대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하시며 말리셨다. 한 번 쉬움을 맛본 내가 어려운 길을 택할 리 없었다. 수능이 다가오자 놀기만 하던 친구들도 하나 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과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은 당연했다.


 학교도 가기 싫고 공부도 하기 싫은 나는 이미 학교 무단결석을 밥 먹듯 하던 중학교 때 친구와 놀기 시작했고, 그 친구는 나의 도피처였다. 나는 대책 없이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고 결석 일수는 점점 늘어갔다.


 놀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불편한 마음이 커지는 중이었다. 차라리 자퇴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더 편할 것 같았다. 열아홉 살의 철없는 나는 검정고시 학원에 찾아가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검정고시 학원 원장님이 하셨던 말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학생은 그냥 학교 졸업하는 게 인생에 도움이 더 될 것이며, 여기는 나이 드신 분이 새 인생을 찾으려고 오는 곳이라며 자퇴를 말렸기 때문이다.


 출석부의 1/3 이상이 결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께서는 눈물을 보이시며 이러다가 학교 졸업 못하면 정말로 큰일 난다고 하셨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철이 들지도 않았지만 남들이 후회한다고 하니 억지로 학교를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수업일수를 채워 졸업을 했다. 지금에야 입시 전략으로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지만, 돌아보면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서른셋 백수가 된 내 이력서에 고등학교 졸업 대신에 검정고시 합격이라고 써야 했다면 나의 자격지심이 하나 더 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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