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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름 Dec 10. 2019

[수면교육] ① 어쩌면 그것은 희생을 가장한 귀차니즘

둘째 수면교육을 다짐한 사연

◎ 첫째 수면교육에 실패한 둘째맘입니다. 아이 둘을 안고 자다가 만신창이가 될 지경에 이르러 둘째 수면교육을 다짐했습니다. 수면교육 이야기는 저 스스로 수면교육을 꾸준히 진행할 유인을 만드는 한편 밤잠을 설치는 엄마 아빠들과 과정을 공유하고 싶어서 시리즈물로 연재할 생각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첫째 수면교육은 완전히 실패했다. 첫아이가 만 한 살이 될 때까지 수면교육 관련 서적을 여섯 권 가량 읽었는데 소용이 없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은 어떤 상황이 발생했고 나는 거기서 바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렇게 첫째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됐다. 둘째가 나오기 직전까지 첫째는 내 품에 안겨서 잤다. 밤새도록 나는 첫째를 품어야만 했다. 누군가 그 장면을 보면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작은 뒤척임에도 잠에서 깨서 울어버리는 첫째를 매일 안고 자는 것은 (나중에는 사무치도록 그립겠지만) 당시에는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첫째 수면교육이 실패로 돌아가자 나는 마음속으로 나 자신을 설득했다. ‘내가 이렇게 안고 자면 아이 정서에 훨씬 더 좋을 거야’, ‘원래 아이는 엄마 품에서 자는 게 맞는 것 같아’, ‘아이를 따로 재우라는 건 엄마 아빠 좋자고 하는 짓이지’라고. 


그렇지만 엄마도 사람이고 사람은 자기가 힘든 만큼 뭔가를 바라게 된다. 나는 남편이 내가 아이를 안고 자는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 앞에서 ‘알아서 기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전에 사람이 잠을 편히 못 자니 늘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장 아까운 것은 아이의 베개, 공갈젖꼭지가 돼 주느라 잃어버린 나의 시간이다. 아이가 잠드는 9시 이후 나는 더 활동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누워 있어야 했다. 내가 움직이면 아이가 깰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9시 이후 모든 활동이 중단됐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는 비생산적인 일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둘째가 태어났고 나는 좌우(左右)에  첫째, 둘째를 끼고 자게 됐다. 정말 기이한 모습이었다. 누군가 천장에서 내가 자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결코 아름답진 않을 것 같았다. 짧지 않은 시간 둘째는 내 젖을 물고 있고 나는 오른팔로 첫째를 감싸고 있었다. 요가에도 없는 이상한 자세다. 


나는 다시 피곤에 시달렸다. 밤에 조금도 편히 자지 못했고 어깨는 늘 굳어 있다. 신경은 날카로운데 그 누구도 이 ‘희생’을 알아주지 않는 상황. 


‘희생’, ‘희생, ‘희생’... 그런데 과연 그것은 희생이었을까? 


나는 문득 내가 ‘희생’이라고 말한 아이들을 안고 자는 생활이 희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희생이라고 했지만 며칠이 걸리는 수면교육을 하기엔 아이를 안고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히려 귀차니즘이었다. 


‘나는 아이를 못 울리겠어’라며 마음 약한 척을 했지만, 잠이 부족한 나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낮에 첫째에게 영상을 틀어주고 누워있다. 이유도 없이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는 둘째를 보며 ‘넌 언제 잘거냐’라는 생각만 한다. 


희생이라는 멋진 단어로 포장한 박스를 뜯어보니 귀차니즘이 내 우스꽝스러운 잠자리를 비웃고 있었다. 인내심 부족이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 끝에 나는 둘째 수면교육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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