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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름 Jul 25. 2019

American Dream, 평범할 기회.

미국에서의 삶에선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내가 이곳, 미국에 온지도 4년이 훌쩍 지났다. 미국에 오기 전 내 머릿속은 환상 투성이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는 소위 '어메리칸 드림'이 있었다. 마침 당시 유행하던 '한국이 싫어서'라는 책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환상을 키워줬다. 


여전히 이곳에서 지내볼 기회를 가진 것은 분명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4년 전 한국을 떠날 때 생각했던 것처럼 '장밋빛'은 아니다. 




어메리칸 드림, 기회의 땅. 비교적 역사가 짧은 미국은 유럽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그냥 땅덩어리만 봐도 왜 'God bless America'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미국에 유럽인들이 정착한 완전 초기에는 'untouched' 상태의 자연과 자원이 무궁무진했을 것이고 당시 비교적 발달했던 유럽의 산업이나 기술로 이곳에서 해볼 일이 많았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얼음 덩어리처럼 보이는 북부 캐나다 상공을 날 때마다 미국 땅에서 느낄 수 있는 비옥함과는 확실히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초기 미국이라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지금도 생존해 있는 많은 '킴스 클리닝'의 오너들을 보면 분명 미국은 세탁소 하나만 잘 굴려도 내 자식을 변호사, 의사 시킬 수 있다는 희망의 땅이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렇게 이민자들에게 미국에서는 언젠가는 금(gold)이 기회였을 것이고 어떤 때는 부동산, 어느 시대에는 네일숍이나 세탁소, 가발, 주얼리가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2019년 미국이 주는 기회는 무엇일까? 4년간의 미국 생활 후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나름 잠정적 결론을 냈다. 




우선 나는 미국에 대해 깨진 나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절대적으로 미국이 한국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80~90년대만 해도 미국과 한국에서 사는 것엔 정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2015년 이후 미국에서의 삶은 꼭 그렇지 않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친 의료 시스템이다. 이 기형적인 시스템은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이 얼마나 훌륭한 제도인지 실감케 한다. 소아과 의사가 아이의 귀를 파주고 400불을 의료비로 청구했다는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나의 지인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병원비가 30만 불이 나왔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나는 미국 사람들이 병명을 매우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감기나 위염에 그렇게 많은 하위 구분이 있었는지 나는 미국에 오기 전엔 알지 못했다. 내가 젊을 때 한참 인기 있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변호사인 미란다나 부유한 샬럿이 웹사이트에 자신의 증상을 입력하고 자가진단(self diagnosis)을 하는 장면은 나에겐 생소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일상이었다. 


나 역시 미국에 온 후로 반(半) 의사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아이가 입이 아프다며 엄청 힘들어했는데 소아과에 가도 제대로 된 진단을 내려주지 않았다. 몇 가지 가능성만 제시해줬을 뿐이다. 바이러스성인지 세균성인지 검사를 하는데도 며칠이 걸렸고 그 중간에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며 엄마는 아무런 도구도 없이 이 병이 바이러스성인지 세균성인지를 항생제에 따른 아이의 반응을 보며 연구해야 했다. 의사가 말해주기 전에 나는 내 아이가 바이러스성 구내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의사는 내가 이 같은 판단을 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나에게 세균 검사 결과가 음성이라고 알려주었다. 


물가도 정말 '더럽게' 비싸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땐 마트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맛있는 식재료들이 이렇게 싸다니'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보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훨씬 높은 미국인들을 보며 이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고 한국이 얼마나 살기 힘든 나라인가를 떠올려 본 적도 많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내가 할머니 집에서 나와 작지만 내 집을 마련하고 내 차를 몰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10만 원이면 될 것 같은 배관공 일이 여기선 800불, 1000불이 되었다. 가전제품을 사면 포함된 설치 서비스 같은 것은 없다. 얼마 전 800불짜리 식기세척기를 500불에 할인받아서 구입했는데 설치비로 230불이 나갔다. 외식비는 얼마나 비싼지. 한국에 가서 외식을 하면 식당 주인한테 송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이곳 외식비는 비싸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는 나라라 좋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그냥 살아가기에 정말 많은 비용이 드는 나라다. 


정말 의외였던 부분은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더 주먹구구식이라는 사실이다. 일단 나는 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줄 알았다. 이 사람들은 약속을 잡을 때 window라는 것이 너무 넓다. 한국은 대부분 어떤 서비스 업체랑 시간 약속을 하면 30분 내지 한 시간 단위로 얘기해준다. "12시에서 12시 15분 사이에 뵙겠습니다" 혹은 "12시에서 12시 30분 사이에 뵙겠습니다"다. 여기는 그렇지 않다. "10시에서 2시 사이에 갈게요"라든가 "10시 이후에 가겠습니다"다. 


미국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잘할 줄 알았다. 물론 잘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미안할 때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부딪혔을 때나 발을 실수로 밟았을 때 등 정말 사소한 일일 때. 큰 일이고 정말 문제가 될 수 있을 때는 쉽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워낙 고소를 잘하는 나라이고 네 책임과 내 책임을 잘 따지는 나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얼마 전 가전제품 하나를 배송받을 일이 있었는데 물건이 찌그러진 채로 도착해 물건을 돌려보내야 했다. 고객 서비스에 전화를 건 나는 단 한 번도 'sorry'라는 단어를 듣지 못했다. 실제로 고객 상담을 담당하는 사람은 책임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물건을 판매한 영업 직원의 책임도 아니었으며 배송 직원의 책임도 아니었다. 책임 소재가 여기저기 나눠져 있어 딱히 'sorry'라는 말을 꺼낼 사람은 없고 내 기분만 나쁜 상황이 됐다. 


선진국이라 복지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서 자체가 한국보다 열려있는 것 같고 제도적으로도 많은 뒷받침을 해주지만 일단 앞서 언급했듯 일반적인 의료가 꽝이다. 메디케이드 같은 제도가 있지만 어느 정도 벌면 혜택을 받지 못하고 민간 보험마다 혜택이 제각각이다. 메디케이드를 받는다고 해도 주에 따라 좋은 의사를 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하다. 어찌 됐든 중간에 껴있는 사람은 이래저래 고생하는 구조다.




그렇다면 다시, 2019년 미국이 주는 기회는 무엇일까. 한국과 미국 밖엔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그것을 그저 '평범할 기회'에서 찾았다. 


어떤 한국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배우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한국은 평범한 것에 대해 벌을 준다'고. 그래서 모두가 평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혹은 뛰어나야 겨우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이나 명문대를 간 것이 평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뛰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살기가 영 힘들다.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일자리를 잡은 것은 못난 게 아니라 평범한 거다. 그런데 평범하면 벌을 받는다. 


이곳에서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에선 소위 '듣보잡'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기 모교의 로고가 그려진 스티커를 자기 차에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한국에서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크든 작든 자신이 이룬 것을 대체로 뿌듯하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미국과 한국 경제가 처음부터 출발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일단 땅이 넓고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처음 미국의 소비가 전체 경제 활동의 70%를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소규모 개방경제, 철저히 수출 및 대기업 중심의 나라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나는 소비가 경제의 70%를 차지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후 미국에서 살아가며 월마트나 코스트코 등에서 사람들이 카트 한 가득 장을 보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도착지까지 끝도 안 보이는 미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1년에 몇 번이나 있는 대규모 쇼핑시즌을 목격하면서 나는 소비가 70%를 차지하는 나라를 점점 체감하게 됐다. 


어쨌든 이런 게 가능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땅이 넓고 많은 사람들, 다양한 인종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선 구글이나 애플, 페이스북, 골드만삭스에 다녀야 하는 게 아니다. 물론 모든 업종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웬만한 대학을 나와 이름 모를 회사에 취업을 해도 적당히 벌고 산다. 결국 내수가 크기 때문에 꼭 이름을 들어본 엄청난 기업에 취업하지 않아도 그 기업이 적당한 월급을 나에게 줄 수 있는 거다. 평범에서 조금 뛰어나면 좀 더 잘 살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진다. 한국에서 대학입시나 취업에 쓸 에너지를 이곳에서 쓴다면 한국보다 더 나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해도 된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은 너무나 크다. 평범해도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바닥에 깔렸기 때문일까. 내가 만난 미국인들(2세 포함)은 대부분 자신이 이룬 것과 아는 것에 대해 자신만만하다. 속으로 나는 몇 번이나 '저 사람 한국에 있었으면 되게 힘들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 적도 많다. 


종종 총도 쏘고 엽기적인 범죄도 많지만, 미국이 주는 '평범할 기회'는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이다. 이것이 정말 많은 미국의 단점을 상쇄한다. 특히 평범해서는 안 된다고 느껴온, 혹은 평범한 삶이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며 좋은 차를 끌고 호텔에 가서 종종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 온 나로서는 이런 절대적 평범함을 누릴 기회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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