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민 Oct 27. 2023

민소연 시인의 <드라이아이스-결혼기념일>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드라이아이스 - 결혼기념일 / 민소연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치밀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1. 자세하고 꼼꼼하다. 치밀한 계획.

2. 아주 곱고 촘촘하다. 무늬가 치밀하다.


치밀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이 단어가 참 매력적인 속성을 가졌구나 생각하게 된다. 눈으로 감각할 수 있으면서도 추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시어로 쓰기에 굉장히 적합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본문 중에 쓰인 이 단어처럼 치밀하게 쓰인 시 한 편을 감상한 느낌이었다. 시라는 세계를 알수록 시는 참 매력적인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길이가 짧아서 쉽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잘 쓴 시 한 편을 쓴다는 것은 산문보다 어려운 영역 같다. 불필요한 표현을 제거하고 최대한 압축적인 표현으로 상황을, 장면을 그려나가야 한다. 정교한 그림 속 숨겨진 서사처럼.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상징들. 그것을 발견하고 읽어 내려가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기쁨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일과 시를 감상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서로 닿아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서로 다른 타인과 타인을 하나로 묶는 가장 극단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친구나 동료 관계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금기들의 뚜껑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그러나, 강한 구속력을 갖는 그러한 결혼제도 마저 결국 우리를 하나로 묶지는 못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가 타인인 존재들이다. 공감을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상대방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저 그렇구나 이해하려 노력할 뿐. 우리 속에 살지만,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혼자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것은 나만의 몫이 아닌 것이 된다. 인간이라는 동질성 만으로 나는 외롭지 않다.


'영원한 타인처럼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는' 존재. 

결혼식이 시작될 때 걸었던 새끼손가락에 뭉쳤던 검붉은 피는 각자의 깍지에 뭉치는 검붉은 피로 나아간다.

내기라는 형식을 통해 서로를 들여다 보고 그래서 같은 편이 되는 장면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부여된 숙명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무리 꼭 껴안아도 상대방의 무엇도 녹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만 그러한 행위가 주는 위로를 생각하게 된다. 살갗이 들러붙을 정도의 밀착된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살아가게, 버티게 하는 것은 이런 친밀하고 따뜻한 손길, 말 한마디가 아닐까.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슬픔을 나누면 정말 반이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당연하다고 바로 대답했지만, 그 질문을 받고 나자 정말 그런지 확신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집에 와서 곰곰이 여러 날 그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생각할수록 그 질문은 슬픈 질문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녀는 아무리 나눠도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저 골목의 끝, 방향을 바꾸면 기쁨이 침묵하며 서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골목을 벗어나봐야 알게 되는 일.


우리는 힘든 순간 힘들다고 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언제부터 쿨한 성격을 옹호하게 되었는지, 조금이라도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면 큰일 나는 것처럼 길들여졌다.

얼마 전, 친구에게 큰 위안을 얻었다. 늘 힘든 일이 지나가고 나서야, 기자가 보도 자료를 쓰듯이 내 상황을 브리핑하곤 했는데, 그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저 무심하게 힘든 나를 그대로 고백했다. 다행히, 친구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주었다. 나를 비난하지도 않았고 섣부른 충고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자 평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요동치던 심장이 쿵하고 깊은 심연으로 추락한 것처럼 급작스러운 변화였지만 튀어 오르는 물방울 하나 없이 마음은 잔잔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마음속에 그렇게 깊고 고요한 높이가 있었는지. 내가 알고 있던 가장 낮은 높이를 뚫고 더 낮은 세계에 이른 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무조건적인 수용과 위로가 참 따뜻했고, 한 번 경험하고 나자 다시 그 세계에 욕심이 나기도 했다.


혼자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지만, 우리는 옆 사람을 통해서 앞사람을 통해서 버티며 나아간다. 누가 더 힘든지 내기하면서 서로 위안을 받는 존재들 인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현우 시인의 <세례> 시를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