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알아보시고 접수 먼저 해두세요. 지금 머리나 목 부위에 충격이 가해지면 안 돼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화면에 띄워진 나의 MRI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머리, 그러니까 뇌에서 내려오는 강줄기 같은 척수가 목 쪽에서 좁아지다못해 거의 잘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 충격이 가해지면 저기가 끊어진다는 소리인가' 진료실을 나설 때까지도 멍하기만 했던 나는 계산을 하려다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카드단말기에 사인을 하려는데 굳어지고 있던 오른 손가락 때문에 펜을 제대로 쥘 수 없었던 것이다.
작년 11월, 나는 척수증 진단을 받았다. 척수증은 경추의 퇴행성 질환 때문에 척수가 눌리면서 발생하는 척수 기능 장애를 말한다. 잘 알려진 병이 아니기에 간혹 통증이 있는 경우는 목 디스크로, 통증이 없이 마비가 진행되는 경우는 뇌졸중으로 오인한다고 한다. 목 디스크는 말초신경을 눌러 초기부터 통증이 심하고 덕분에 빠르게 병원을 찾게 된다. 게다가 말초신경은 머리카락처럼 다시 자라 재생이 되기 때문에 완치가 가능하다. 하지만 척수증은 중추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전조증상이 거의 없고 마비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야 알게 된다. 불행하게도 중추신경은 다시 재생되거나 복구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늦어도 너무 늦게 알았다. 손가락이 저리고, 손목과 쇄골이 아프고, 날개뼈가 불타는 느낌이 있었지만 지나고 나서야 그 모든 증상이 내 몸에서 보내는 간절한 신호였다는 걸 알았다. 나는 술을 마신 것처럼 두 다리가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들었던 날에야 겨우 병원을 찾아갔다. 그 뒤 대학병원 진료를 보러 갔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처음 만난 담당 교수님은 "어떻게 왔어요?" 심드렁하게 물으셨다가 내 MRI 사진을 클릭하시고는 "너 뭐야?" 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그리고 옆에서 우리 딸 MRI가 아닐 수도 있지 않냐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다 큰 딸 죽을 때까지 똥오줌 받아낼 수 있어요?" 하며 사지마비 직전이라고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하셨다.
처음 병원을 찾은 날부터 수술실에 들어가기까지 3주 정도가 걸렸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나의 몸은 끓어오르기 시작한 냄비처럼 모든 증상이 한번 시작되자 폭발하듯 몰려왔다. 나의 오른 손가락은 단단히 굳어져 글씨를 쓸 수 없었고 젓가락질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부축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었는데 그마저도 열 걸음 정도를 걷고 잠시 쉬어야 했다. 가장 참담했던 두 가지는 감각 마비와 대소변 장애였다. 누워서 두 발을 비벼도, 바지를 입어도 내 살갗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수술 3일 전부터는 가슴 아래로 전부 남의 살 같았다. 간신히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나오면 몇 걸음 못 가 어김없이 바지에 소변을 흘렸다. 그것조차 다리 피부에 감각이 없어 잘 몰랐다.
수술 전날,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며 들은 말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교수님은 이 수술은 이미 나타난 증상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목 앞부분으로 수술하기 때문에 목에 상처가 남고 식도와 기도를 젖혀두기 때문에 음식을 먹거나 말을 할 때 평생 불편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 부위가 척수와 동맥 쪽이라 수술 중에 사지마비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신마취 수술조차 처음인 나에게 이 모든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수술 당일,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 수술실에 가는데 창밖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옆에서 부축해주시던 어머니가 "두리야, 눈이 온다. 수술 잘 될 거야." 하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다행히 그 말 그대로 수술은 잘 되었고 퇴원하기까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병이 찾아온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겨울 내내 침대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던 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게다가 수술 직후에는 마비 증상이 그대로 남아 있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울었다. 우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운동을 정말 좋아하는 나에게 목뼈 3개에 나사 6개를 박아 평생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신체적 장애를 넘어 마음의 장애로 다가왔다. 나 스스로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이 사실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인들의 연락은 무시했고 가족 외에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나의 몸의 미세한 변화를 느꼈다. 밤마다 오른팔이 잘려나갈 듯한 통증에 시달렸지만 오른 손가락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다리도 제법 가벼워지고 양발에 이불의 촉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실오라기 하나만 남았던 나의 척수 신경이 안간힘을 쓰고 있구나 싶었다. 정말 대견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나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데 너는 왜 그러고 있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나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먼저 친구와 친한 회사 동료들에게 연락해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모두 하나같이 진심으로 함께 슬퍼해주고 응원해 주었다. 그 뒤 나는 내 몸의 상태를 살피고 가능한 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았다. 매일 1만 보 걷기와 함께 읽고 싶었던 책 읽기,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 그동안 바쁘다며 계속 미루기만 했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무언가 시작하니 몸 상태도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비록 나의 상황은 똑같았지만 내가 마음을 달리 먹으니 모든것이 달라졌다.
매일 걷고 있는 한강과 경의선숲길에 봄이 찾아왔다. 유독 올해는 벚꽃보다 벚꽃이 지고 나서 그 자리에 한가득 매달린 초록잎들이 더 예뻐 보였다. 그리고 전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을 테지만 아직까지 회색빛인 풀과 나무들도 눈에 들어왔다. 초록의 향연에 남아 있는 불청객들, 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아직 내 몸에 남아있는 증상들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풀과 나무에도 초록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