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조선 498호 2023.06.26 기고 게재글]
어느 날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사고가 났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매뉴얼’은 어떻게 돼 있는지를 살피게 된다. 사람들은 해당 사고와 관련해 매뉴얼에 대응 기준과 원칙이 있었는데, 그걸 지키지 않았다거나 매뉴얼에 기준이 규정돼 있지 않아 위기관리 사각지대를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그 이후로 사회 전반적으로 각 조직에서 매뉴얼 보완이나 개선 작업이 많아진다.
위기관리 매뉴얼의 의미
‘위기관리 매뉴얼’은 사실 위기관리 사전 준비(crisis preparedness)에 대한 상호 약속의 기록물이다. 발생 가능성이 큰 위기 유형을 세부적으로 찾고 실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를 간주해 대응하는 방안을 미리 모색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사전 준비가 제대로 돼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매뉴얼이 갖추어져 있는지’로 귀결되는 경향이 커졌다. 매뉴얼 개발이나 보완을 담당하는 실무자 중에는 “위기관리 사전 준비를 위해서 투입하는 예산 자체가 매우 적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또 “전사적으로 모든 조직의 책임자나 임원을 참여시켜서 진행하는 절차는 최대한 줄여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의외로 이들이 이런 입장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조직 내부의 책임자들이 위기관리 사전 준비가 정말 효과적인지, 그 예산이 효율적인지를 따지기 때문이다.
위기가 발생해야 이것이 제대로 됐는지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듣게 된다. 위기 사전 준비의 효과는 정말 있는 것인가. 매뉴얼을 만들어 놓으면 위기관리가 잘되는 것인가.
‘사전 준비’에 덧씌워진 무용론은 ‘매뉴얼’이라는 결과물에 집중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위기관리 사전 준비는 진단과 조사, 매뉴얼 개발 과정의 참여, 훈련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구축된다. 위기 상황 시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합의된 의사 결정 기준을 만들고, 발생 가능성이 큰 이슈를 중심으로 적절한 대응 기준을 설정해 놓아야 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기업의 위기관리 컨설팅을 진행할 때, 제일 먼저 해당 기업의 대표에게 “이번 위기관리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누구도 상황을 회피하거나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목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신속하게 상호 보고와 조치가 긴밀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감추고 책임질 것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정확한 상황 파악을 통해 최상의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 재무적 손실이든 명성이든 책임 있는 모습으로 손실을 최소화하자”라는 답변들이 대부분이다. 사전 준비는 바로 이처럼 위기관리 목적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도록 투자하는 행동이다.
위기 계획 ‘사전 준비’로 혼란 대응
미국 소설가 헨리 밀러(Henry Miller)는 “혼란은 현실이 기록되는 점수”라고 했다. 자연재해나 재정 위기, 또는 개인 사건·사고 등 명백한 대외적 요인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위기 상황에서 혼란에 대응하는 것과 비상 상태에서 혼란에 대응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 ‘사전 준비’라는 요소가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위기가 발생했는가로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제대로 된 대응을 통해 신뢰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얻을 수도 있다. 위기관리 사전 준비의 효과가 바로 이것이다.
위기에 대비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일어나기 전에 준비하는 것이다. 미리 계획을 세운다면 위기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혼란의 감정들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고, 일을 진행하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이 위기 계획(crisis plan)은 전사적 차원에서 발생 가능성 큰 잠재 위기를 진단하고 명확하게 규명한 후 우선순위로 관리할 이슈 유형을 중심으로 대응 절차, 원칙, 전략 등을 개발하는 것이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위기 정보 확보’다. 그런데 위기라는 것은 불확실성을 수반한다. 즉 정확한 정보를 바로 찾을 수가 없다. 원인이 무엇이고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때로는 피해자와 사상자의 명단조차도 알 수가 없다. 해당 사안과 관련된 담당 부서의 자료도 원하는 순간에 필요한 형태로 얻기가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불확실성을 더 높이는 것이 부서 간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위기가 발생하면 조직 내부 부서뿐 아니라 조직 외부 환경의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경계를 넘나들면서 상호작용이 이뤄져야 한다.
위기 정보의 흐름을 파악하고 보고-지시-조치의 일련의 과정이 신속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상세 위기 프로세스를 계획안에 보다 세부적으로 구성해 놓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규약과 같은 것이다. 이를 통해 위기 발생 시 ‘혼란’의 반응이 아니라 ‘정리’의 대응이 가능하게 된다.
계획이 세워지면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는다. ‘위기관리 근육과 지구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이는 발생한 사건·사고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기 위해 ‘민감한 위기 인식’을 향상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평상시 업무를 하다가도 위기 국면으로 들어갔을 때,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위기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지 스스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앙통제적 기능이 제대로 가동돼야 혼란이 줄고 정확한 위기 대응 소통이 가능하다. 실제 위기 현장 사례들을 보면, 즉각적이고 올바른 대응이 위기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손실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기관리팀 정보 취득 권한 보장 필요
위기 대비 계획에는 보고-지시-조치의 일련의 과정이 구성돼 있지만, 그것은 규칙일 뿐이다. 미리 준비된 상세한 프로세스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간의 압박이 큰 위기 상황에서 매뉴얼을 하나하나 들춰 보면서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규칙을 운영하고 적용할 것인가, 최대한 피해와 손실을 줄이기 위한 대응 방안은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
즉, 위기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계획을 짜더라도, 그 위기 상황에 대해 모의훈련(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위기 대비 계획과 위기 대응 시뮬레이션이 상호 연결돼야 위기관리의 사전 준비가 완성된다는 의미다.
‘조직이 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위기관리팀과 정보에 대한 의사 결정의 중앙 집중화라고 답변해 왔다. 그런데 중앙으로 정보가 올라가는 과정과 의사 결정이 집중되는 과정에서 위기 대응에 실패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그건 그 현장에서 적합한 전문성과 권한을 갖춘 숙련된 팀이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조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든 얻을 수 있는 권한을 숙련된 팀에 줘야 한다. 위기 매뉴얼을 보완하고 개편하기 전에 위기관리팀을 비롯해 위기 의사 결정자에게 ‘연습 세션’을 열어주고 실행하도록 하자. 계획은 당신이 행동할 프레임워크(framework)다. 긴 안목을 가지고 역량을 강화하는 사전 준비를 진행하자.